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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방향 잃은 듯… 사랑한단 말못한 슬픔이”

관련이슈 소설가 박완서 타계

입력 : 2011-01-23 22:09:25 수정 : 2011-01-23 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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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에 드리는 편지 왜 이리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커다란 돌덩이가 어깨를 누르는 느낌이었는데, 그것이 점점 커져 등짝 전체에 얹혀 있는 듯합니다. 몸을 일으켜 선생님을 뵈러 가야지 생각하면서도 온종일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이 무력감이 슬픔인지, 슬픔이라는 감정이 이토록 무기력한지 분간조차 되지 않습니다.

◇김형경 소설가
가만히 앉아 저는 선생님의 사진 한 장을 떠올립니다. 진짜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 놓은 한 장면의 영상입니다. 15년쯤 전 선생님을 모시고 유럽 여행을 갔던 길에 비엔나의 한 중세성당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저희 일행이 입구 근처에 멈춰 서서 관광객의 시선으로 성당 내부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선생님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걸음으로 성당 정면을 향해 걸어들어가셨지요. 앞에서 세 번째쯤 되는 자리에 앉으시더니 두 손을 맞잡아 이마에 댄 채 고개 숙인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저는 선생님 뒷모습만 보고 있었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해 들어온 빛이 성당 공간을 가로질러 하필 선생님 어깨에 닿아 있었지요. 다소 길다 싶은 시간 동안 기도는 계속되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낯선 감각을 느꼈습니다. 그 장면이 사진처럼 선명히 내면에 새겨져 그 후 생의 어떤 순간마다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 사진에 생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이 압축되어 있어 혼돈이나 교만의 순간마다 제가 무의식적으로 그 사진을 꺼내보며 방향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제 삶의 모델이었습니다. 문학을 공부하던 초기부터 저는 “박완서 선생님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까지 제가 읽었던 대부분의 소설들과는 달리, 선생님 작품은 여성의 시각으로 본 여성의 삶을 여성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을 기억할 때도,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때도 선생님은 여성의 관점을 견지하셨습니다. 지금 이곳의 여성 삶을 묘파하면서 꺼내보이는 진실은 너무 아파서 그 속에서 여성 작가로서의 길을 다시 더듬어봐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단아한 태도, 청량한 음색으로 “나는 페미니스트예요”라고 말씀하시면 그 울림은 고요히 멀리 퍼지는 힘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이 있었기에 후배 작가들이 마음껏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는 후배들을 뿌리치고 떠나며 “나는 걷는 거 좋아해요”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뵌 후 저도 걷기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매일 아차산을 산책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후 저도 매일 동네 뒷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매일 오전에 A4 용지 한 장 분량씩 글을 쓰신다는 말씀을 들은 후 저도 그와 같은 글쓰기 습관을 몸에 익혔습니다. “돈을 가장 가치있게 쓰는 방법은 여행 같아요”라는 말씀을 들은 후 저도 간간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의 모든 소중한 습관들은 실은 선생님을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떠나셨다니, 저는 문득 생의 방향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한동안 무기력하고 방향 감각 없는 나날을 보낼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아픈 사실은 제가 얼마나 선생님을 사랑했는지, 선생님이 계셨다는 사실에 감사했는지 한 번도 말씀드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는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는 죄송함까지 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무력감이나 죄송함조차 남은 이들의 이기심일 것입니다.선생님께서는 부디 이 땅의 모든 것을 털어버리시고 밝고 환한 곳으로 가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안녕히, 안녕히 가십시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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