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본은 우리와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한다. 과거 일본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첫 이유로 꼽을 수 있지만, 한·일 두 나라의 국민성이 상당 부분 다른 것도 가까울 수 없는 이유로 지목될 수 있다. 현대사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으로 일관한 일본이지만 국가를 벗어던진 국민 개개인은 너무도 친절하고 순박하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이런 착한 국민성을 한순간 침략 성향으로 돌변하게 만드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스티븐 턴불 지음/남정우 옮김/플레닛미디어/1만9800원 |
많은 일본 연구가들은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을 그 원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가 열연했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던 세력도 사무라이였다. 조직과 보스를 위해 생명까지 던지는 충직한 면모는 그러나 맹목적일 때는 극악한 폭력적 성향을 보였던 게 그간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사무라이 연구로 유명한 영국 리즈대학교 스티븐 턴불 교수가 쓴 ‘사무라이’는 이런 일본적 정서를 비교문화적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고대 일본에서 본래 ‘시중을 드는 자‘라는 의미를 지녔던 사무라이는 이 후 충성과 명예를 기치로 내걸고 죽음까지도 미덕으로 승화한 전사로 각인된다. 저자는 조선에 글 읽는 선비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칼을 든 사무라이가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사무라이 정신의 근본을 섬나라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국민성에서 찾고 있다. ‘시마구니 곤조(섬나라 근성)’란 말은 지성인들 사이에선 거의 쓰이지 않지만 극히 일본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도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내달리는 사무라이는 일본 전국시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
저자는 무사도와 사무라이 정신을 알지 못하고는 일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무라이의 삶이 일반인들에게 도덕적 모범으로 찬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을 이해해야만 일본 사회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사무라이들에겐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이들은 1592∼1598년 벌어진 조일전쟁(임진왜란)에서 상당 부분 전력을 상실한다. 조선을 황폐시킨 것 말고는 귀국 이후 목숨을 바친 대가를 얻을 수 없었던 사무라이 집단은 후일 집권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하지만 예전과 같은 위세는 떨칠 수 없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의해 개방으로 치닫는 일본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사무라이는 죽음을 무릅쓰며 저항했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860년대부터 진행된 메이지 유신은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이라는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1877년 초 일어난 사쓰마 반란은 사무라이가 벌인 최후의 전쟁이었다. 사쓰마 반란은 정한론의 발상지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모인 영주들이 개혁을 향해가는 천황과 사카모토 료마 등 혁명가들을 제압하기 위해 벌인 내전이다.
◇칼을 든 사무라이가 할복 직전 유서를 앞에 놓고 결심을 다지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
최초의 사무라이는 기마궁수였고, 전사의 기량을 평가하는 기준도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보병에게 활이 지급되면서부터 오로지 칼을 사용하는 무사만을 사무라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일본도, 즉 칼은 사무라이 후손들의 가보로 전해지게 된다.
에도시대 사무라이이자 화가로도 이름을 떨친 미야모토 무사시가 남긴 말은 사무라이의 맹목성을 제대로 표현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 목숨을 바쳐 달려나간다. 하늘이 앞을 막는다면 하늘을 벨 것이고, 신이 앞을 막는다면 그 신마저 벨 것이다.”
정승욱 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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