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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죽음까지도 미학으로 승화한 戰士

입력 : 2010-09-17 21:55:23 수정 : 2010-09-17 21: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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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교수 비교문화적 시각으로 풀어내 섬나라의 폐쇄·보수적 국민성이 원인
흔히 일본은 우리와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한다. 과거 일본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첫 이유로 꼽을 수 있지만, 한·일 두 나라의 국민성이 상당 부분 다른 것도 가까울 수 없는 이유로 지목될 수 있다. 현대사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으로 일관한 일본이지만 국가를 벗어던진 국민 개개인은 너무도 친절하고 순박하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이런 착한 국민성을 한순간 침략 성향으로 돌변하게 만드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스티븐 턴불 지음/남정우 옮김/플레닛미디어/1만9800원
사무라이/스티븐 턴불 지음/남정우 옮김/플레닛미디어/1만9800원


많은 일본 연구가들은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을 그 원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가 열연했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던 세력도 사무라이였다. 조직과 보스를 위해 생명까지 던지는 충직한 면모는 그러나 맹목적일 때는 극악한 폭력적 성향을 보였던 게 그간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사무라이 연구로 유명한 영국 리즈대학교 스티븐 턴불 교수가 쓴 ‘사무라이’는 이런 일본적 정서를 비교문화적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고대 일본에서 본래 ‘시중을 드는 자‘라는 의미를 지녔던 사무라이는 이 후 충성과 명예를 기치로 내걸고 죽음까지도 미덕으로 승화한 전사로 각인된다. 저자는 조선에 글 읽는 선비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칼을 든 사무라이가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사무라이 정신의 근본을 섬나라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국민성에서 찾고 있다. ‘시마구니 곤조(섬나라 근성)’란 말은 지성인들 사이에선 거의 쓰이지 않지만 극히 일본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도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내달리는 사무라이는 일본 전국시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사무라이적 삶의 면모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문화에서 이상적 삶의 전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무라이들의 이상은 자신의 보스인 다이묘, 즉 영주에 대한 경호와 충성으로 실현되곤 했다. 이러한 충절을 죽음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사무라이 사이에서 일종의 의무였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죽으면 뒤따라 할복을 감행하는 모습은 사무라이들을 당대 직업군인과 구별되는, 의리 있고 매우 독특한 집단으로 격상시켰다.

저자는 무사도와 사무라이 정신을 알지 못하고는 일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무라이의 삶이 일반인들에게 도덕적 모범으로 찬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을 이해해야만 일본 사회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사무라이들에겐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이들은 1592∼1598년 벌어진 조일전쟁(임진왜란)에서 상당 부분 전력을 상실한다. 조선을 황폐시킨 것 말고는 귀국 이후 목숨을 바친 대가를 얻을 수 없었던 사무라이 집단은 후일 집권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하지만 예전과 같은 위세는 떨칠 수 없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의해 개방으로 치닫는 일본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사무라이는 죽음을 무릅쓰며 저항했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860년대부터 진행된 메이지 유신은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이라는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1877년 초 일어난 사쓰마 반란은 사무라이가 벌인 최후의 전쟁이었다. 사쓰마 반란은 정한론의 발상지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모인 영주들이 개혁을 향해가는 천황과 사카모토 료마 등 혁명가들을 제압하기 위해 벌인 내전이다.

◇칼을 든 사무라이가 할복 직전 유서를 앞에 놓고 결심을 다지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이 반란을 주도했던 반정부 우익 사상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죽음과 함께 메이지 정부의 개혁에 대항하는 군사적 저항은 막을 내린다. 사쓰마 반란에 가담한 3만여 명의 사무라이 출신 반란군 중에서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최초의 사무라이는 기마궁수였고, 전사의 기량을 평가하는 기준도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보병에게 활이 지급되면서부터 오로지 칼을 사용하는 무사만을 사무라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일본도, 즉 칼은 사무라이 후손들의 가보로 전해지게 된다.

에도시대 사무라이이자 화가로도 이름을 떨친 미야모토 무사시가 남긴 말은 사무라이의 맹목성을 제대로 표현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 목숨을 바쳐 달려나간다. 하늘이 앞을 막는다면 하늘을 벨 것이고, 신이 앞을 막는다면 그 신마저 벨 것이다.”

정승욱 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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