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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31) 무술의 고장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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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6-25 09:53:12 수정 : 2010-06-25 09: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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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라성 같은 무술 명인 배출한 ‘忠·義·信’의 도시
팔공산·비슬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6·25 전쟁중 많은 무예인들 대구에 안착
태권도·합기도 등 한국 근·현대 무술의 원천
우리나라 근·현대무술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해방과 광복에 이어 불어 닥친 6·25 민족상잔은 대구를 무술의 고장으로 자연스럽게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해방 후 일본에서 들어오는 재일한국인이 귀국하면서 여러 사정으로 도중에 머물거나 자리를 잡은 것이 대구요, 6·25 때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도시가 부산과 함께 대구였기 때문에 피난을 가다가 도중에 눌러앉은 곳이 대구이다. 그런 점에서 대구는 우리 민족의 지킴이와 같은 도시다. 또 역사를 거스르면 가야를 복속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경주가 동쪽으로 가까이 있고, 가야의 중심인 고령이 지척이다.

대구의 지세를 보면 한반도의 등뼈인 태백산맥이 남쪽에서 마지막으로 지맥을 뻗은 팔공산이 북동쪽에서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고, 비슬산이 남쪽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그 사이에 낙동강이 북남으로, 그 지류인 금호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는 분지이다. 여름에는 가장 덥고, 겨울에는 가장 추운, 한서의 차이가 전국에서 가장 극심한 고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도 저절로 신체가 단련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기라성 같은 무골들이 배출되는 것은 자연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대구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환경적으로 무골의 고향이 될 소질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무골의 전통은 한반도의, 한국 역사의 지킴이로 대구를 인식시키는 데에 일조를 하였다. 6·25 때 낙동강 전선의 반격이 없었으면 현재 대한민국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는 해방 후 합기도, 국술, 태권도, 유도가 뿌리를 내리고 세를 넓히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합기도 무술의 전설적인 영웅인 최용술이 그랬다. 그는 고향인 황간으로 돌아가는 길에 짐 가방을 잃어버려 정착한 곳이 대구였다. 무예인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구에서 여장을 풀었다. 대체로 근·현대무술의 윤곽을 그려보면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부산, 경남, 그리고 전라도로 퍼져나간 양상을 보인다.

대구의 무덕관(武德館)은 무예나 스포츠의 종목과 상관없이 떠올리는 ‘무덕(武德)’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무덕’은 태권도와 유도의 대표적 도장 이름이었으며, 그러한 정서와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무예가 성한 대구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무덕인 충(忠), 의(義), 신(信)의 도시인 셈이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6·25전쟁 당시 무술의 고향 대구·경북의 명인들을 보면 합기도는 대구가 본향이다. 서복섭·장승호·서병돈·문종원·김무홍·지한재·강문진·신상철 등 무술계에 족적을 남긴 합기도인이 모두 대구 출신이다. 그리고 김무홍의 신무관, 지한재의 성무관, 도주 직계 도장인 원무관-수덕관(修德館)에서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된다. 그 후 1959년 지한재의 성무관은 안동에서, 1960년 김무홍의 신무관은 대구에서 도장을 각각 서울로 이전하게 되면서 드디어 서울 중심이 된다. 이렇게 합기도는 대구에서 그 술기와 기반을 다진 뒤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1959년 9월 3일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기념 사진. 앞줄 좌로부터 황기, 윤쾌병, 최홍희, 노병직, 체육회 임원 중 한 명, 현종명, 엄운규, 이남석, 그리고 뒷줄 좌로부터 김순배, 고재천, 남태희. 이들 중에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분들이 있다.
한편 도주 직계에서 합기도를 익힌 서인혁은 전국을 돌며 재래무술, 사찰무술, 궁중무술 등을 종합하여 창시무술 ‘국술’(國術)을 만들어 국술원을 개원하고 세계적인 무술로 키워내는 데에 성공한다. 비록 합기도에서 출발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전래의 전통무술과 중국무술 등을 종합하여 새로운 무술을 창안해냈다. 국술은 창시무술 가운데 체육으로 변신한 태권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창시무술에 속한다.

서인혁은 1959년 합기도를 바탕으로 전통무술을 융합하고 현대인에 맞게 개량하고 집대성했다. 국술은 현재 스포츠인 태권도가 아닌 무술로서는 세계적으로 큰 수련 인구를 가진 무술 단체이다. 맨손 무술과 무기술 등 술기(術技)가 27기 3600여 수에 이른다. 1991년 미 육군사관학교는 이를 체육종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국술은 현재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네덜란드·독일·룩셈부르크·벨기에·스코틀랜드·스페인·영국·아일랜드·이탈리아·포르투갈 등 세계 50여개국 150여만명이 수련하고 있으며, 유럽지역 90여개 도장에서 20여만명이 수련중인 글로벌 무술이다. 2008년 10월 11, 12일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국술원 세계선수권 및 시범대회’를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열었다.

국술은 70년 중반 호국무예로 각광을 받았다. 국술은 태권도·합기도와 함께 ‘호국무예’에 포함됐다. 75년에는(5월 1∼2일) 문화체육관에서 ‘세계국술시범 및 선수권대회’를 열었으며 당시 140명이 출전하였는데 이 중 70여명이 이미 외국인이었다.

◇무덕관이 있던 대구시청 자리.
서인혁 이외에도 합기도를 거쳐 간 이름난 무인들은 허일웅(한국 기공협회회장), 전동석(대한기공과학협회 회장), 하일호(대한석문호흡협회 회장), 고 조자룡(불무도협회 회장), 이주방(미국 화랑도협회 회장), 김희영(미국, 한무도협회 회장), 장수옥(특공무술 회장), 이원욱(선관무 협회회장), 김병천(용무도 총재) 등으로 합기도는 여러 창시무술의 바탕이 된다.

태권도의 경우도 대구를 떠나서는 발전을 운위할 수가 없다. 1945년 해방 이후 국내에 여러 개의 도장이 생기게 된다. 무덕관·청도관·지도관·창무관·연무관·오도관 등 크게 6개 도장이 있었다. 이 도장들이 1960년대에 합쳐져서 현대 태권도의 모체가 된다. 여기서 가장 영향력이 큰 도장은 무덕관과 청도관이었다.

무덕관은 황기 선생에 의해서 설립됐다. 황기는 어릴 때 택견을 배우고, 중국에서 태극권과 쿵푸를 배웠다. 덧붙여 그는 철도 회사에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오키나와 가라데 책을 읽고 가라테의 철학을 읽었다고 한다. 1957년 황기는 한국의 고전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한국의 전통 무술 ‘수박’을 발굴한다. 이 무예서로부터 손과 발의 타격 기술을 취해서 무덕관 태권도의 기술을 완성한다. 무덕관은 당시 최대의 태권도 도장이었다. 1953년과 1970년 사이에, 전체 태권도 수련자의 약 75%가 무덕관에서 배웠다.

태권도 인구가 가장 많았고, 실력자들이 운집한 곳이 대구였다. 태권도 도장 중에서 가장 많은 출신을 배출한 무덕관의 황기 선생은 대구 남산동 대건학교 부근에서 수박도 연원의 태권도를 시작하였다. 이즈음 김도기 선생의 연무관도 대구에서 도장을 시작하였다. 태권도의 전신인 당수도의 명인들이 대구에 많았다. 대구에서 제일 먼저 당수도를 들여온 김도기는 태권도의 대명사가 된 격파의 달인이었다. 무덕관 출신의 홍종수·지상섭·최남도 등이 대단했고, 연무관 출신의 차영수도 태권도계에 이름을 남긴 분들이다.

무엇보다도 태권도를 창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두 인물은 무덕관의 황기와 오도관의 최홍희였다. 두 사람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자주 접촉할 기회가 있었고, 가까이서 신의를 다진 것이 후일 큰일을 도모하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 셈이다. 당수도를 태수도로, 그리고 태권도로 발전시키고 정착하기까지 쌍두마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최홍희는 캐나다로 망명한 후 북한 중심의 국제태권도연맹(ITF, 1971년)을 운영하여 ‘국기 태권도’를 만들어준 대한민국에 배신행위를 하고 말았다.

최홍희의 ITF에 대항하여 창립된 것이 세계태권도연맹(WTF)이다. WTF를 만든 인물도 대구 출신의 김운용씨이다. 그는 태권도계를 통합한 대한태권도협회(KTA)의 초대 회장(1971년)을 맡고, 이어 초대 국기원 원장(1972년)에 취임하면서 태권도의 총본산 국기원(國技院, 1974년)을 건립한 인물이다. 그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하여 초대 총재를 맡았고, 대한체육회장·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1992년)을 역임했다.

그는 태권도를 경기방식으로 확립시켜 경기종목으로 발전하게 하였으며, 세계태권도대회를 처음 열어 태권도의 세계화에 혁혁한 공을 이루었다.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스포츠 외교가로서 1988 서울올림픽 유치와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2001년 비록 차점으로 실패하기 했지만 유색인종으로서는 처음으로 IOC위원장 선거에 도전하였으며, 2004년 IOC위원을 자진사퇴할 때까지 임기 4년의 부위원장을 두 차례 지냈으며, 집행위원을 두 차례, 그리고 IOC의 최고 요직인 TV분과위원장을 지냈다.

이에 앞서 태권도가 스포츠로 변신하도록 한 초석을 놓은 곳도 대구이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산, 경주, 안동, 포항 등의 태권도 지관 개설은 태권도 인구의 대폭적인 확충에 성공하였으며 이를 발판으로 태권도가 전국체전에 처음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게 한 곳도 대구에서 열린 1962년 제43회 전국체전(대구시민운동장)이었다. 이듬해 1963년 태권도는 전국체전 정식종목이 되었다. 따라서 태권도가 ‘무도’(武道)에서 처음으로 ‘스포츠’ 경기로 영역을 넓히는 역할을 한 곳은 대구·경북이었으며, 그것이 나중에 올림픽 시범종목(1988년, 서울올림픽)이 되고, 다시 올림픽 정식종목(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되는 시발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태권도의 중심도 역시 대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71년에 태권도가 ‘국기’로 지정되는 데에도 대구·경북 지역 태권도인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대구는 합기도, 태권도 이외에도 유도의 중심도시이다. 지금 대구시청 자리에 있었던 무덕관(경북유도회)은 전국 유도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 최고의 시설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무덕관은 당시 유도와 검도도장을 겸하였다. 이선길은 유도계에선 신화적인 인물로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실력으로 제패한 인물이다. 그는 유도에의 꿈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주었으며 그래서 ‘유도계의 대부’로 통한다.

유도의 시작은 서울 YMCA유도부(1909년 나수영·유근수)였지만 실질적으로 한국 유도계를 움직인 곳은 대구이다. 대구의 유도는 계성학교를 설립한 북장로교 선교사 앤더슨에 의해 간이회(簡易會)의 이름으로 1906년 11월에 달성공원에서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그 후 계성학교를 비롯한 대구고보 등 5개 학교에 보급하기 시작하여 유도 인구를 확충해갔다. 대구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순회유도사절단(1955년, 6월)을 보낼 정도였으며 당시 권용우·이석도 등 5명이 참가했다.

최영호는 대구계성학교 학생유도부 창설자로 후진 양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신치득(경찰유도의 사범), 변영수(육군헌병학교 교관)도 초기의 인물이다. 유도계가 나은 가장 큰 거물은 계성학교의 유도가 낳은 전 국회의원 신도환 선생이었다. 신도환은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에서 야당 권력의 거중 조정을 한 현대 한국정치사의 거물로 성장하여 정치인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실은 유도인으로서도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다. 대구가 그후 스타 유도선수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병근·김재엽·이경근을 길러낸 것도 이 같은 전통의 영향이다.

권투계에도 대구 출신의 명인들이 많다. 권투 하면, 신구실 선생이 떠오른다. 이분은 권투로 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후예로는 이삼용이 있고, 노문학·노추학·박희도 선수도 대구 권투계를 빛냈다. 합기도·태권도·유도·권투 등 무예와 스포츠 전반에서 대구·경북은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이는 예로부터 무예와 체육에 대한 탄탄한 전통 덕분이다.

대구 지방에서 무술 혹은 격투에 관한 한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박용주이다. 그는 명치대학을 나온 인텔리로서 시인이기도 했으며, 대구 교남학교(대륜 전신)와 서울 중동고를 나왔는데 유도가 강도관(일본계) 5단이었다. 그런데 그는 흔히 싸움의 달인이라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 시라소니에 못지않은 인물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박용주는 별명이 ‘명치대 의용’(메이다이닷쯔), ‘싸움의 신’(깸까노메이지류)이었으며 당시 동양 3국(한국, 일본, 중국)의 ‘주먹의 황제’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대구라는 지방에서 은둔하다시피 하여서 그렇지 만약 서울 무대에서 활약하였다면 이름이 더 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싸움이나 무용담에 관한 그의 일화는 더 많다. 권투선수였던 이삼용과 박재수는 주먹에 관한 한 당시에 무적이었는데 이 두 사람이 박용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삼용이 식사 중 갑자기 빠르고 강력한 주먹을 날리자 순간적으로 이를 피하고 박치기로 격파했는데 이삼용은 병원에 실려가야 했다고 한다. 박재수는 마음먹고 어느 날 갑자기 선수로 주먹을 날렸는데 박용주는 어느새 피하여 박재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박재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김두한은 7년 정도 선배인 박용주를 알아보고, 대선배로 대우했다고 한다. 6·25 전쟁 후 김두한·이정재·시라소니는 부산에서 서울로 갔지만 박용주는 대구에서 줄곧 머물렀다. 김두한이 알아보고 대결을 피한 사람은 두 사람이다. 시라소니와 박용주이다. 박용주는 아마도 그가 일본 유도계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해방 후 자중하는 의미에서 은신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가 정식으로 활약하였으면 주먹 세계의 판도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대구는 이렇게 무술의 고장이다. 그래서 그런지 5·16혁명을 일으켜서 민족을 5000년의 가난으로부터 구해 낸 박정희가 혁명을 처음 꿈꾸던 곳이 대구요, 그가 이곳 대구사범학교 출신임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구는 문무겸전의 도시이다.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대구는 바로 이러한 무골의 기운으로 문무균형, 천지합일이 되어서 민족의 구원자로 등장한 셈이다. 대구는 역사, 자연, 무골이 함께하는 도시이다. 그래서 무술의 고장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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