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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武를 통해 본 한국문화 (18) 태권도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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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1-17 23:26:39 수정 : 2009-11-17 23: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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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겸전의 기본정신 살려 武德에 충실하자
전통 무예이론 가다듬고 미적 가치 추구 필요
각종 양생법 등 전래의 건신술도 함께 익혀야
심신의 균형 발전, 문무를 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무예인 태권도는 세계인들이 한국을 생각할 때 동시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이며 이미지이다. 태권도는 여러 모습으로 변모할수록 무예로서 혹은 스포츠로서 힘과 기술의 동시 발전이라는 기본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무예로서 태권도가 존재해야 예술 태권도든 스포츠 태권도든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태권도는 먼저 무덕(武德)의 모습에 충실해야 한다. 1970∼80년대 초기 해외 개척 시대의 태권도는 분명 새로운 형태의 애호가들을 자극할 수 있는 모험적 요소가 충분했었다. 주먹 하나로 돌을 깨고, 얼음을 부수고, 나무판자를 쪼개는 등 완력을 바탕으로 한 파괴적인 힘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여 경외감을 갖게 했었다. 이후 태권도가 경기체육으로 방향을 전환하자 이 ‘차력적 힘’은 풍선 터뜨리기, 얇은 송판 쪼개기, ‘곡예적 발차기’로 변해 갔다. 이는 ‘무예’의 영역에 남고자 했던 태권도가 제도권 체육으로 옮겨가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락성과 경외심을 갖게 하는 차력적 요소가 많이 사라진 그 자리를 메울 것은 오직 무덕밖에 없다. 무덕이란 바로 문무겸전의 정신이고, 무예의 힘이 살상이나 전쟁에서 덜 필요하게 된 지금, 무예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 이유이다. 차력적 요소의 상실은 세상에 적응한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무술 본래의 힘과 기술의 과시에서는 손해가 없지 않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국기원 전경.
현재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태권도 정착이 오래된 나라일수록 성인 태권도 인구는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으며, 대부분의 도장들은 어린 초등학생들로 꾸려가는 실정이다. 파괴적인 강한 힘, 강한 정신력으로 어필했던 태권도가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태권도가 어린 시절 신체단련의 수단이 되고, 어른에 이르러서는 몇몇 전문 체육인의 메달 따기 종목에 머문다면 무예로서 태권도가 설 자리는 미래에 없을 것이다. 올림픽 메달을 따기 위해 육성되는 스포츠 태권도의 한계는 기교파 선수의 양산으로 이어졌고 ‘강한’ 태권도의 이미지는 점차 소멸하고 있다. 가라테 시절의 엄숙주의 무도정신, 주먹에서 나오는 파괴적인 힘은 분명 경외감과 함께 호기심을 유발하여 참여해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지만, 곡예적인 발차기는 갈채는 받아낼 수 있을지언정 참여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대중들은 서커스를 보고 즐기기는 하지만 결코 자신이 곡예사가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현재 태권도가 흥미 유발을 위한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해 내고 있지만, 대개 아동 유희적인 것들로 제도권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런 것들로서는 과거의 무도로서의 영광을 재현해 내기란 어려울 것이다(무예연구가 신성대씨 조언). 

◇어린이들이 태권도 수련에 열중하는 모습. 어린이들만의 애호만으로는 무예로서의 태권도는 실종된다.
현재 태권도가 표방하는 체육미학은 당연히 정서적으로는 엄숙하면서도 쾌활함을, 행동적으로는 격하고 대담함을, 형태적으로는 단순하면서도 통일됨을, 취미로서는 강렬하면서도 숭고함을, 반응으로서는 충격적이면서도 신비적인 것으로 규정짓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음습하고, 신경질적이고, 딱딱하고, 단조롭고, 폭력적이고, 자학적이며, 도발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저변에 깔려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한 견제가 태권도인에게 필요하다.

미적인 것이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 도덕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현대 대중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따라서 태권도가 계속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이 미적 가치 추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외적인 미와 내적인 미를 동시에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태권도는 궁극적으로 덕을 갖추어야 한다. 병가오덕(兵家五德)은 흔히 지(智)·신(信)·인(仁)·엄(嚴)·용(勇)이다. 무가오덕(武家五德)은 엄(嚴)·용(勇)·성(誠)·의(義)·절(節)이다. 동양의 덕(德)에는 외향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외덕(外德)이 있고, 내적인 자기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내덕(內德)이 있다. 무예라면 내외를 함께 수련하지만, 결국은 외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는 그 분류의 불분명함 때문에 그 추구하는 도덕적 규범이 “스포츠맨십이냐, 무도(武道) 정신이냐, 무덕이냐”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태권도만의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덕성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경기용 태권도와 무예로서의 태권도를 분리할 필요도 있다. 

◇스포츠로서의 발전을 위해 태권도는 선수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권도는 공격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경기용은 아무래도 경기에서 승패와 관련되기 때문에 점수 따기 중심이 되기 쉽고, 따라서 무예로서의 의미가 줄어들기 쉽다. 그래서 선수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안전주의로, 메달 따기 위주로 나아가기 때문에 역전의 상황이나 반전의 묘미가 줄어들고 있다. 또 한번 점수를 따면 그때부터 그것을 지키려는 자세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따분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렇게 하여 세계인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다면 이는 큰 손해이다. 스포츠로서의 태권도도 작금의 스포츠 동향에 맞추어 개선이 필요하다. 천재일우의 기회로 올림픽 종목이 된 것을 한꺼번에 잃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서는 안 될 일이다.

무예로서의 태권도는 또 다른 것을 요구받고 있다. 예컨대 기술 중심이 아니라 파워 중심, 혹은 고도의 개인기술과 심신수련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권도에 한국 전통무예의 정신이 더 들어가야 한다. 무예의 목적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상대(적)를 살상케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보다 나은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속성을 지닌다. 태권도의 족보 찾기와 순혈주의는 도리어 무예로서 태권도의 힘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설픈 민족주의에 다름 아니다. 좋은 기술은 다른 무예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또 그것을 한국인에게 맞게 재창조할 수도 있어야 한다.

고대든 현대든 최고의 과학기술은 먼저 국방에 소용된다. 전통무예 역시 고대에는 최고의 과학이었다. 따라서 무예정신은 곧 과학 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무예계는 타인(혹은 타 종목)의 기예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그 중 좋은 점은 제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태권도가 전통성만 강조하고, 오직 현재의 기술에만 만족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보다 우수한 기술에 제압당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과거에 우수했던 무예가 지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진 예는 많다.

자신의 법식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곧 죽은 무예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무예 명가에는 수백년 동안 경험적 지혜가 축적되어 전해진다. 무예인이라면 당연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옹색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단 무예에서 떨어져 나온 체육(스포츠 혹은 놀이)은 체육 종목으로서의 차별성 때문에 다른 기술을 받아들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배타적인 성질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정해진 규정에 따라 단순하게 정해진 기술을 반복적으로 실행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유지하려 애쓰게 된다. 단지 보다 많은 애호가를 끌어모으기 위해 운영의 묘만 살리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전통무예와 현대스포츠가 확연히 구별된다.

전통적인 동양 무예에는 누천년 동안 축적된 무예에 대한 경험적 이론들이 무수히 많다. 음양(陰陽)·표리(表裏)·허실(虛實)·강유(剛柔)·종횡(縱橫)·내외(內外)·입원(立圓)·장단(長短)·기락(起落)·쾌만(快慢)·난나(?拿)·소말(消抹)·삼절론(三節論)·오법(五法)·경론(徑論)… 등의 수많은 이론(이치)들이 있다. 이들 중 현재의 태권도에 접목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내용적으로는 전혀 전통적인 것을 흡수하지 못했으면서 오히려 그 연원만을 전통적인 것으로 꾸미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된다. 

◇충주세계무술축제, 세계 무술문화의 기선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태권도는 건강과 양생(養生) 방법에 대해서도 부족하다. 태권도가 진정 육체의 건강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건전한 신체, 건전한 정신을 추구한다지만 현대의 체육이 하나같이 경기 방식을 택하는 바람에 신체의 일부만을 반복적으로 무리하게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몸을 망가뜨리고 있다. 특히 격투체육으로서 태권도는 그 위협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벽돌 깨기, 무리한 발차기 등 차력(借力)적인 기법을 도입하는 바람에 관절 부위가 망가지는 심한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만약 태권도가 주장대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고유한 전통무예라고 한다면, 그 숱한 세월 동안 동양의 정통 양생법과 무예이론, 그리고 실기가 스며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비록 중국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시대 무구옹 이창정 선생의 수양총서에 나오는 양생법, 퇴계 선생의 ‘활인심방’, 북창 선생의 ‘용호비결’,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각종 양생술을 비롯하여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십팔기와 기타 전통 건신술(健身術) 등에서 많든 적든 영향을 받아야 했다. 독자적으로 전해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적 상식으로 전혀 인정받을 수 없다.

예로부터 전통무가(혹은 도가)에서는 반드시 무예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무예 수련의 목적이 가장 먼저 내 몸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종 양생법과 전통의학도 함께 공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태권도는 오직 근(筋)만을 단련하고 골(骨)과 막(膜)을 단련하는 데에는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일반체육처럼 일찍 몸이 쇠하게 되고 만다. 앞으로 태권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이 같은 전래의 건신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더욱 건강한 태권도인 양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의 태권도엔 영웅이 없다”는 말이 있다.

무예계에 무용담이 없으면 그것보다 싱거운 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웅의 이야기는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일본 검도의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극진가라데의 최배달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아쉬운 점이 있다. 그나마 초기 해외 개척 시대에는 입지전적 인물들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특별히 세계인에게 각인된 인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예의 영웅은 없고 실력자가 아닌 행정가가 장기집권과 독선을 자행한다면 태권도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태권도를 통해 이상적인 덕성으로 무장된 모험적인 인재가 양성되어야 하겠지만, 이 역시 현재와 같은 격투체육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태권도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경기체육화의 길을 가는 태권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점점 권법적인 요소가 사라져 가면서 기예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재미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체육 검도가 걸어간 길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무예의 경계에서 더욱 멀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연히 경기체육으로서의 태권도가 더 이상 다른 기예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이 점이 시중에서의 태권도 애호자의 증가를 막고 있다.

현재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어린이 위주로 도장이 운영되고 있고, 그들을 계속해서 붙들어두기 위해 쌍절봉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공식 기예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태권도 자체에 프로그램 부족을 겪고 있다. 아이들이라 해도 3년 이상을 붙들어두기가 여의치 않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이 계속하기엔 힘에 부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태권도의 권법적 특징인 단조로운 직선 운동은 지속적인 법식의 개발을 가로막고 있으며, 끊어치기는 관절에 커다란 무리를 주어 운동 수명을 극히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단순과 반복은 현대 일본 무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바로 이런 점이 태권도가 경기체육으로 용이하게 전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태권도의 법식은 무기를 다룰 예비 동작이 되지 못했다. 적이나 맹수를 상대로 한 기예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칼 대 칼의 검도처럼 오직 맨손 대 맨손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호신체육이었다.

개명 후 한국에서 군사체육으로 도입되면서 개인호신술이었을 적에 남아 있었던 약간의 ‘권법’적 기예마저 단체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바람에 더욱 직선적이며 단순하게, 그리고 규격화되어 갔다. 또한 강인함과 절도 있는 동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끊어치는 기법으로 발전하였고, 상대의 의기를 꺾기 위해 벽돌 깨기 등 차력적 기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점들은 전통무예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건강체육으로서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태권도의 발차기는 스포츠로서는 굳이 흠이라 할 수 없겠지만, 무예의 일반적 논리로는 치명적인 결함에 속한다. 사실 이치상으로 따져 봐도 얼굴을 굳이 발로 올려 찰 필요가 없다. 손은 가깝고 발은 멀기 때문이다. 역으로 손으로 상대의 허벅지나 다리를 공격하면 어찌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굳이 가까운 것을 두고 멀리 있는 것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로 정통무예계에서는 금기시하는 방법이다. 기예의 으뜸은 빠름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격과 방어를 펼치는 것이다. 태권도 기술에는 이런 예가 무수히 많다. 이는 가장 효율적인 직선을 주장하면서도 거리를 무시하는 모순을 범한 것이다.

세계무술축제가 해마다 한국 충주에서 열려 지난해로 11번째(1998년 제1회)를 치렀고, 태권도의 성지가 될 ‘세계태권도 공원’(2009년 9월 4일 기공, 축구장 324개 크기)이 2013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전통무예진흥법’도 만들어져 2009년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세계 무예문화를 선도하는 기선을 제압한다는 입장에서 태권도인의 심기일전이 필요하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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