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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 Life] 문자예술가 여태명 원광대 교수

입력 : 2008-10-02 03:06:32 수정 : 2008-10-02 03: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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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인 듯 그림인 듯… 한글 서체개발 해외 전파
◇여태명 교수가 붓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같은 글씨 연구에 천착해 온 그는 한글의 조형미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독창성과 과학성을 지닌 글자. 어떤 문자보다 우월한 어감·정감·음감을 고루 갖춘 언어. 일찍이 소설 ‘대지’를 쓴 미국 펄벅 여사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문자. 바로 한글은 말 뜻 그대로 ‘큰글’이다. 그 큰글의 아름다움에 20년 넘게 푹 빠진 사람이 원광대 여태명(52·미대 서예과·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장) 교수다.

문자 예술가인 그는 한국적 질감을 담은 다양한 한글 서체를 개발해 세계와 소통한다. 그를 통해 한글의 독특한 조형미를 접한 세계인들은 ‘원더풀!’이라고 소리친다.

그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해체하고 조립해 새로운 조형적인 이미지를 담아낸다. 그의 한글 서예는 그래서 글씨이면서도 그림이다. 여 교수의 작품을 본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는 “먼 데서 보면 그림이요, 가까이서 보면 글씨다. 글자가 보일 만큼 떨어져서 보면 글씨와 그림으로 보였다”고 노래했다. 한마디로 그림 같은 글씨, 글씨 같은 그림인 것이다.

여 교수의 서예를 보면 글씨는 똑바로 써야 한다는 통념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삐뚤삐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미를 연출한다. 우리네 시골 장터의 순박함과 민초들의 삶이 묻어난다. ‘감성을 지닌 글씨’ ‘영혼이 있는 글씨’로 불리듯, 그의 글씨는 똑같은 글자라도 담긴 의미에 따라 다른 모양을 띤다.

“호박꽃과 나팔꽃이 어떻게 같습니까. 꽃이 다르면 ‘꽃’의 글자 표현도 당연히 달라져야 해요. 글씨는 죽은 게 아니니까요. 소리문자이자 상형문자인 한글의 특성을 잘 살리면 얼마든지 살아 숨 쉬는 글씨를 표현할 수 있어요.”
◇‘행’의 ‘ㅐ’에는 남녀가 끌어안은 형상, ‘복’의 ‘ㅂ’에는 소중한 무엇을 그릇에 담은 느낌이 전해진다.

한글 조형에 천착하면서 자연히 한국 고유의 미에도 눈을 뜨게 됐다. 서양의 미의식과 동양의 미의식이 다르고, 중국의 미와 한국의 미가 같지 않다는 지론에서다. 관동별곡과 월인천강지곡 등 조선시대 고전을 톱아보며 우리 글꼴을 연구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많았다.

그런 산고를 거쳐 탄생한 한글의 아름다움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시골 초가집과 민화의 해학이 묻어나는 작품들은 독일 교통역사박물관, 미국 UCLA대, 러시아 모스크바 동양미술관 등지로 팔려나가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중국 베이징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등 5곳에서 개인전이 열렸고, 하와이대 전시회에선 교수·학생과 현지 교민들이 찾아와 한글의 조형미에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한·중·일 작가 초대전과 프랑스 작가와의 교류전 등을 통해서도 한글의 아름다움이 세계에 알려졌다.

그의 한글 작품은 해외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주가를 올린다. 학창 시절을 보낸 전주에는 그의 한글 작품이 유독 많다. 호남고속도로 전주톨게이트에 걸린 ‘전주’ 현판에서부터 한옥마을, 막걸리집에 이르기까지 정겨운 우리 글이 눈에 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글자체 역시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요즘에는 사찰과 교회, 학생들로부터 현판이나 티셔츠·모자에 한글 글씨를 써달라는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예전엔 티셔츠에 한글을 새기면 촌스럽다는 인식이 있었죠. 한글의 글꼴이 다양하게 개발되지 않은 탓이지요. 한글에 미감을 더하면 글꼴이 아름다워지고 활용할 시장도 굉장히 넓어집니다.”

여 교수는 한글 조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지난해 사비를 털어 한글조형연구소를 차렸다. 서예와 디자인의 접목을 통해 글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자는 생각에서 지난 3월엔 한국캘리그래피(calligraphy)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올랐다. 교수, 서예가, 디자이너 등 100여명이 그와 뜻을 모았다. 자신이 맡은 서예과의 간판도 내년부터 ‘서예·문자예술과’로 바꿀 작정이다. 서예를 액자 속에서 해방시켜 우리 생활 가까이 다가서게 하자는 뜻에서다.
◇여태명 교수가 쓴 호남고속도로 전주톨게이트 현판 글씨에는 전주 고장의 넉넉한 인심과 풍요가 묻어나는 듯하다.

그가 한글 서체 연구에 몰두한 것은 독일에서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다. 1991년 베를린 교통역사박물관에서 한·중·일 서예초대전이 열렸다. 우리가 갖고 간 한문 서예를 본 큐레이터가 “중국 작품을 전시하나? 당신들에겐 고유 글씨가 없느나?”고 반문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에 함께 갖고 간 한글 작품을 보여줬더니 액자를 거꾸로 들고서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귀국 후 그해 가을, 우리 민족의 정서가 듬뿍 담긴 민체(民體)를 세상에 내놨다. 이어 94년 민체에 관한 한글 서예판본을 출간하고 98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효봉 흰돌체’ ‘효봉 개똥이체’ 등 컴퓨터용 한글폰트 6종을 CD롬으로 제작했다.

사실, 그의 민체 탄생에는 지난한 여정이 숨어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한글 고서를 모으고 서체를 연구해 온 덕분이었다. 후일 그는 “우연히 전주의 한 골동품상에서 조선시대 민간 서체의 필사본을 처음 본 순간 ‘아! 이거구나’ 하는 감흥이 전율처럼 몸에 흘렀다”고 털어놨다. 그 뒤로 서울 청계천과 대구, 전주는 물론이고 중국까지 돌아다니며 1000여권의 고서를 사 모았다.

외길 인생엔 난관도 적지 않았다. 서예계 원로들은 서예를 상업화한다며 그를 벌레 보듯 했다. 전북 진안에서 11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에게 혹독한 가난과 집안의 반대도 가슴 저린 시련이었다. 취미삼아 배운 서예로 초·중학교 시절 지방과 전국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해 미술 특기생으로 전주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집안에선 ‘환쟁이’는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어느날 하숙방을 찾아온 아버지가 그림과 글씨, 화구들을 아궁이에 넣고 몽땅 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선배들의 붓과 화선지를 빌려 쓰면서 그는 서예에 대한 집념만은 꺾지 않았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묵묵히 세계에 전파해온 그는 앞으로 한글자전(字典)을 만들고 컴퓨터용 폰트를 추가로 개발해 한글 글꼴의 대중화에 힘쓸 작정이다. 한글을 한옥, 한복, 한지, 한국음악 등과 접목해 한국 브랜드를 세계화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한글을 새로운 한류상품으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마음을 열어라! 스스로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인 소통은 그에게 창작 에너지이기도 하다. 한글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는 그의 끊임없는 도전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익산=글·사진 배연국 기자 bykoo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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