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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⑭기록화로 전해진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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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6-04 08:36:13 수정 : 2008-06-04 08: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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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결사항전·전사장면 생생히 묘사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
호국 선열들을 기리는 현충일이 포함되어 있는 6월은 호국의 달로 인식되고 있다. 6일이 현충일로 지정된 데는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상기하고, 악귀가 없는 날에 제사를 지내는 민속 풍습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1953년 끝났지만, 최근까지 6·25와 관련된 행사가 자주 열리곤 한다. 특히 남북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절 초등학생들은 6·25전쟁과 공산당의 만행을 표현하는 그림과 표어 등을 늘 작성하였다. ‘상기하자 6·25’, ‘때려잡자 공산당’과 같은 내용이 주요 주제였다. 남과 북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기 6·25전쟁은 언제나 긴장감을 조성하는 소재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이다. 임진왜란에서 순절한 인물들의 활약을 상기시킴으로써 왜적에 대한 경계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18세기 말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와 19세기에 제작된 ‘임진전란도’는 바로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조선인들의 기억 속에 다시 나타났다.

#1. 1592년 4월, 절박했던 그 순간

1592년 4월13일 일본군은 총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선봉대는 4월14일 부산진을 침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1553∼1592)이 항전하다가 전사하고,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당시 일본군 선발대는 ‘싸우려면 싸우되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비켜라’는 나무 팻말을 세웠지만,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는 글귀를 팻말에 적어 일본군 진영에 보내면서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2만명의 일본군을 2000명의 군사와 도성민으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송상현은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초 조선의 항쟁 의지를 대표했던 정발과 송상현의 죽음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결사항전의 충절은 후대에도 널리 기억되었고, 마침내 ‘임진전란도’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난다.

‘임진전란도’는 1834년(순조 34)에 화원(畵員) 이시눌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다대포진의 전투 장면과 주변의 지리를 묘사한 족자 그림이다. 비단으로 된 1축 족자에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묘사하고 있는 전투는 다대포진과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으로, 화면의 중심에는 부산진 전투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임진전란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전투 장면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하였으며, 조선군에 비해 왜군의 수를 훨씬 많이 그려 넣어 군사적으로 조선이 열세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림의 중심부에는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빽빽이 둘러싼 왜적의 모습과 엄청난 물량의 선박이 전투에 동원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둥그렇게 쌓은 성의 사방에는 문루(門樓)가 있고 남문에는 ‘수(帥)’ 깃발과 함께 조선의 병사가 밀집해 방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해안과 연결된 산수의 모습은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림의 곳곳에 설명을 부기(附記)하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달해 주는 기록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임진왜란의 사천해전 기록화. 상처 부위를 만지고 있는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다.

#2. 순절자 비석과 제단까지 기록

그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까운 장면 왼편에는 다대포진의 전투 모습을 그리고 성의 사방에는 문루가 있고 왜적과 대치한 남문 안쪽에는 장수 깃발이 크게 그려 있다. 조총과 창검을 무기로 몰려 들어오는 왜적에 아군이 힘겹게 대항하고 있다. 다대포진 남쪽에는 몰운대(沒雲臺), 고리도(古里島), 팔경대(八景臺) 등이 그림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몰운대 위에 서 있는 장수는 이순신의 선봉장인 정운(鄭運·1543∼1592) 장군이며 그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정운의 부하임을 알 수 있다. 정운은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장군으로, 그가 부산진 전투에서 사망하자 비통한 심정을 ‘난중일기’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멀리 보이는 그림은 부산진 전투로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룬다. 갑작스런 왜군의 침공에 부산진에서는 첨절제사(종 3품 무관으로서 각 지방의 큰 진(鎭)을 지휘함, 첨사라고도 함) 정발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그림은 이곳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왜적과 아군이 팽팽히 맞선 모습 하며, 성 주변을 빼곡이 둘러싼 왜군들, 지원을 위해 대량의 선박까지 출동시킨 상황 등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남문 밖에는 왜병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도 기록하였으며, ‘帥’ 깃발 뒤편에는 한 여인이 자결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부기된 설명에 의하면 부산진 첨사 정발의 첩인 애향(愛香)이 패배를 앞두고 자결하는 장면이다. 애향의 자결 모습을 그려 넣어 전란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히 묘사하는 한편 여인의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임진전란도’에는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이 후대에 추숭된 내력이 곳곳의 여백에 배치되어 있다. 그림 우측 위에는 부산진 함락과 함께 순절한 부산진 첨사 정발과 그의 첩 애향, 노비 용월 등의 비석과 제단을 넣었으며 좌측 상단에는 다대포 첨사 윤흥신(?∼1592)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을 그려 넣고 설명을 곁들였다. 최근 우리 정부는 연평해전에서 희생한 사람들의 흉상을 제작하여 그 공로를 길이 전하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러한 사례 역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남겨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국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 부산진(그림 상단성)과 다대포진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임진전란도’(이시눌, 1834).
#3. 19세기까지 이어진 전쟁의 기억

‘임진전란도’는 기록화 전문 화가인 이시눌의 정밀한 묘사로 인하여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성의 구조와 군사 배치를 비롯하여 전투에 사용된 무기와 복장, 전함의 구조, 일대의 지리 정보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전투에 관계된 구체적 지명, 전투 후에 제단과 비석이 들어선 상황까지 기록하여 전쟁 후 이 지역이 성역화되어 가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240년이 지난 시점에 이와 같은 그림이 그려진 사실에서 19세기에도 임진왜란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기록화의 주요한 소재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전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항상 경계하게 하고, 위기의 시기에 치열하게 항전했던 충신을 포상하는 조치를 계속적으로 취한 국가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충의 이념을 기록화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장수를 따라 자결하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여 여성의 정절을 강조한 것도 주목된다.

이 작품은 유교 이념에서 특히 중시한 충과 정절을 그림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교화에 큰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회화사적 측면에서는 전투 장면과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라든가, 뛰어난 색채 감각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화원들이 그린 기록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과 동래부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국가적 차원에서 계속 그리게 한 것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게 하는 한편, 위기의 시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분위기를 널리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전란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조선사회에서 보급하고자 하는 충성과 정절의 이념을 전파하는 홍보 매체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4. 정조, 성웅 이순신을 기억하다

조선 후기에는 전쟁 영웅에 대한 추숭 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국가 차원에서 정리하고 홍보하는 작업이 널리 이루어졌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 정조는 1795년(정조 19)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1793년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1794년 정조가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은 것은 이순신 존숭 작업의 완결판이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각종 문헌에 나오는 이순신에 관한 기록과 전쟁 중에 올린 장계(狀啓), 진중(陣中)에서 쓴 일기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책에 수록된 2개의 거북선 그림은 거북선의 실체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규장각에서 활동한 신하 유득공, 이만수가 편찬을 총지휘했으며, 정성을 들인 활자(정유자)와 화려한 표지가 책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편찬 후에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직접 보관하였다. ‘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은 이순신이라는 구국 영웅의 행적을 널리 알림으로써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한편, 혹시라도 전란이 다시 터지면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재탄생하기를 염원한 시대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1960년대 5·16 군사정변과 함께 이순신은 성웅으로 다시금 우리에게 다가왔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무인 이순신과 구국의 혁명임을 강조한 군인 박정희의 이미지가 비슷해서였을까. 박정희 정권 시대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 사거리에 우뚝 솟았고,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은 ‘문화교실’이라는 명목 하에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까지 꼭 보아야 할 영화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이순신은 조선후기 정조 시대, 현대의 박정희 시대에 특히 그 이미지가 강조되고 그에 관한 기록들은 저술로, 영화로 탄생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전쟁 영웅 이순신의 기억은 시대를 초월한 후대의 기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순신의 기억을 통해 위기의 시기에 또 다른 전쟁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는 점은 조선시대나 현재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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