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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의 길에서 만난 사람] 오스트리아 그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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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4-25 10:34:30 수정 : 2008-04-25 10: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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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지붕이 아름다운 '유럽문화의 수도' 오스트리아 그라츠
◇ 무르 강에 설치된 인공섬 디 인셀(Die Insel). 달팽이를 닮은 독특한 모습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라츠행 기차를 탔다. 낮 기차는 보통 한산한데, 이상하게도 이날은 승객이 많아 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찾아 계속 다음 칸으로 이동하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컴파트먼트(세 좌석씩 마주보는 구조로 되어 있는 6인실)를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아도 되나요?”라고 물었더니 앉아도 된다는 제스쳐를 취한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일기장을 꺼냈다. 영수증 정리를 하려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어로 말하는 두 사람은 흑인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가 넘쳐나는 프랑스, 터키인들이 많은 독일과는 달리 오스트리아에서는 다른 인종을 거의 볼 수 없다.

영어 악센트도 특이한 데다 한 친구가 말을 너무 재미나게 하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앗, 너 영어를 할 줄 아는 거야?” 재미있게 말하던 친구가 물었다. “미안해. 네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듣고 말았어.”

 ◇ 슐로스베르크의 시계탑.
다시 둘이 얘기를 나누더니 문득 필자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좋은 사람이구나?”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 아직 말도 안 해봤는데….” “척 보면 알지.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컴파트먼트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야.”

예전에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여성은 차가운 눈으로 필자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필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이다. 그 후로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아무에게도 질문을 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단 한 번의 경험 때문에 오스트리아인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도 나의 경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가 앉은 칸에 왜 들어왔지?” “그야, 기차 안에 자리가 없어서 계속 칸을 옮겨 다니다가 이곳에 유일하게 자리가 있어서지.”

“우리 자리에 여유 있는 건 아무도 앉고 싶어하지 않아서야.” “아…”

“너는 우리가 흑인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이곳에 앉았으니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단지 우리가 흑인이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앉지 않아.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고. 내 옷차림 보이지? 금목걸이를 걸고 좋은 시계를 차고 깨끗한 옷을 입었어. 이렇게라도 입지 않으면 자꾸 검문을 당해.”

그들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오스트리아가 인종차별이 심하긴 심한가 보다. 그들은 나이지리아에서 넘어와 오스트리아에서 일하고 있는데 주말이 되어 빈 근교의 집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나이지리아에 가보지 않았다고 했더니 여행정보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잠시 뒤 “이야기를 나눠 즐거웠어”라며 기차에서 내렸다.

◇ 오스트리아 전통 복장을 입은 기세라.
기차는 목적지인 그라츠에 거의 다 와 가고 있었다. 그라츠에 가는 이유는 기세라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녀는 순례자의 길에서 만났던 오스트리아인으로,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언니인데 NGO에서 일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의 길에는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이 걷고 있었다. 그녀는 필자가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누그러뜨려 줘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와 아빠는 타고난 워커(Walker)야. 등산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둘이서 캠핑장도 많이 다녔단다.” 덕분에 순례자의 길에서 잘 걷는 편이 아니었던 필자와는 한 번도 함께 걸을 수 없었지만, 매번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산티아고의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본 후 한 달이 지나 이제는 순례자의 길이 아닌 ‘현실’에서 그를 본다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기차는 그라츠에 도착했고 역으로 나가자 귀걸이를 한 기세라가 반갑게 웃으며 서 있었다.

“언니, 몰라보겠어. 매일 똑같은 옷만 입고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귀걸이를 하고 예쁜 옷까지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 신기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웃으며 서 있었고, 잠시 뒤엔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 꼭 껴안았다.

여행 중에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라는 말에 누군가 답했다. “저는 세계인이에요.”

세계인에게는 인종, 종교, 학력, 빈부의 구분이 없다. 여행은 우리를 한국인에서 세계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는 마법의 열쇠다.

여행작가

◇ 슐로스베르크(산성)에서 바라본 그라츠 전경. 모던아트 미술관과 달팽이 모양의 인공섬이 보인다.


# 여행정보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직항으로는 대한항공과 오스트리아 항공이 있다. 빈의 남역(Sudbahnhof)에서 그라츠역까지는 기차로 2시간40분이 걸린다. 빈에서 슬로베니아로 이동할 때 들르거나 빈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 괜찮은 도시다. 21유로 정도 하는 유스호스텔이 기차역 근처에 있으며, 시설이 좋고 깨끗하다.

먹어볼 만한 음식으로는 삼계탕 맛과 흡사한 닭고기 수프와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슈니첼(Schnitzel)이 있다. 슈니첼은 돈가스와 같은 음식으로 송아지고기나 돼지고기를 얇게 두드린 후 튀김옷을 입혀 튀긴 요리다. 돈가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소스 대신 자른 레몬이 함께 나오며 레몬즙을 뿌려 먹는다. 여자들은 하나를 시켜 둘이 나눠 먹을 정도로 크기가 크다. 가격은 7∼8유로.

#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

한국인들에게 낯선 도시인 그라츠는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고향이며,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의 주인공이 출발한 기차역도 바로 이곳이다. 아름다운 붉은 지붕이 많은 구 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3년에는 유럽 문화의 도시로 선정되었다. 그라츠의 랜드마크로는 해삼과 비슷한 모양의 모던아트 미술관이 있는데, ‘다정한 외계인(Friendly Alien)’으로 불린다. 구 시가지를 흐르는 무르 강에는 현대적인 다리와 달팽이 모양의 디 인셀(Die Insel)이라고 불리는 인공섬이 있다. 유명한 미술가인 비토 아콘치(Vito Acconci)가 만든 작품으로 밤에 가면 훨씬 아름답다. 산성(Schlossberg)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붉은 지붕의 그라츠는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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