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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60> 1400년 만에 발굴된 '후지노기'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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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5-06 14:07:02 수정 : 2008-05-06 1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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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60> 1400년 만에 발굴된 '후지노기' 고분
◇일본 문화재 당국은 후지노기 고분이 최초 발굴된 해인 1985년으로부터 3년이 지난 뒤 고분 내부 일부를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은 고분의 전경.
일본 나라시 남서부 ‘이카루가’(斑鳩) 지역에는 1980년대 후반 한일 양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6세기 ‘후지노기’(藤ノ木) 고분이 있다. 후지노기 고분은 한국 관광객이 하루에도 수백 명 이상 찾는다는 ‘호류지’(法隆寺·법륭사)에서 서쪽으로 불과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묘지이다. 하지만 일본은 발굴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고분에 관한 내용을 대외에 공개하기를 몹시 꺼렸다

길이 48m, 높이 8m의 둥근 무덤(圓墳)인 후지노기 고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23년 전인 1985년 7월의 일이었다. 당시 최초 발굴자인 나라 현립 가시와라 고고학연구소는 무덤의 횡혈식 석실에서 붉게 칠한 집 모양의 가형 석관을 찾아냈다. 지붕 돌을 들춰내기만 하면 관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조성된 돌관이다. 그러나 발굴단은 지붕을 들어내지 않고 돌관 옆구리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투시경을 집어넣은 뒤 내부를 살폈다. 가형 석관 내부 매장물에 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훗날 석관 옆면에서 코끼리와 봉황을 등 장식으로 삼은 금동제 말안장 장식 금구(金具)가 발견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발굴단은 아무런 발표도 없이 가형 석관을 예전처럼 다시 흙으로 덮어버렸다.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 1929∼) 교수가 처음으로 후지노기 고분 매장품이 백제 왕족과 관련됐다고 지적한 때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였다.
◇일본문화재 당국이 공개한 후지노기 고분의 석실.

이 교수는 “후지노기 고분에서 출토된 장경호(목이 긴 단지)와 운두가 높은 잔(高杯)은 충남 논산과 전북 남원 등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와 닮았으며, 백제 토기를 편년으로 따져 말하자면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해당한다고 본다. 또 6세기 전반 충남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에는 귀갑문(龜甲文)이 많다. 이를테면 무령왕비의 나무 목침에는 금박 된 귀갑문이 있으며 그 중에는 봉황·용·연화문 등을 그렸고, 왕의 족가(足枷)에는 금줄의 귀갑문으로 되어 있다. 후지노기 고분에서 귀갑문으로 된 금동제 신발(履/沓)이 나왔는데 무령왕비의 금동제 신발도 똑같은 문양이었다.

특히 무령왕의 큰 칼(大刀)이며 자루(鍔)에는 귀갑문 속에 봉황이 투조(透彫)돼 있어서 후지노기 고분에서 나온 말안장 장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아름다움이 떠오르고 있다”(‘藤ノ木古墳の被葬者, 百濟王族’ 1989)고 지적했다. 
◇후지노기 고분의 붉은색 가형 석관.

후지노기 고분 출토 금동제 신발은 우리나라 각지의 고분에서 나온 것들과 그 유형이 똑같은 것이며, 특히 무령왕릉 출토의 금동제 신발 및 신촌리 9호 고분 출토 금동제 신발과 후지노기 고분 출토 금동제 신발들은 서로 똑 닮았다는 공통점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간단한 석관 투시경 조사 이후 흙으로 고분을 덮어버리자 한일 양국에서는 고분 공개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았다. 왕실 주무 관청인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분을 공개하라는 여론에 밀려 마침내 1988년 10월 8일 덮었던 흙을 걷어내고 크레인으로 2t 무게의 돌관 뚜껑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후지노기 고분발굴조사위원회’ 멤버는 교토대학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명예교수를 비롯하여 간사이대학 아보시 요시노리(網干善敎) 교수, 도시샤대학 모리 고이치(森浩一) 교수 등이었다. 후지노기 고분이 1400년이라는 긴 잠을 마치고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석관에서는 발굴단의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큼 화려한 부장품들이 쏟아졌다. 먼저 주목된 것은 피장자 2구의 유골이었다. 관 북쪽의 유골은 키 180㎝에 이르는 20대 남성으로 추정됐다. 귀고리를 비롯해 42㎝ 길이의 금동제 답(沓, 쇠신발)이 나왔다. 관 남쪽에 놓여 있던 답 길이는 38㎝였으며 부장품 등으로 미뤄볼 때 ‘장년의 여성’으로 추정됐다. 6세기 왜나라에서는 모자(母子)를 합장한 예가 많았기 때문이다. 관에서 쏟아진 부장품들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금동제 관(冠)을 비롯하여 금동제 신발(답), 큰 칼인 옥전대도(玉纏大刀), 말안장 장식인 금동장투조안금구(金銅裝透彫鞍金具), 유리·옥류의 귀고리, 비단류의 섬유 제품 등 왕족 이외에는 갖출 수 없는 호화로운 부장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후지노기 고분의 가형 석관의 내부 모습.

가시와라 고고학연구소의 이토 유스케(伊藤勇輔) 연구원은 “이런 부장품들은 6세기 강고한 정치·경제적 지배력을 갖춘 최상류층의 것”이라며 “백제, 가야 등 조선반도의 영향을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藤ノ木出土 豪華副葬品比較’ 1988)고 지적했다. 이토 연구원은 “이산광대식관(二山廣帶式冠·두 개의 산을 연결한 듯한 생김새의 관) 형식은 샤미즈카고분(三味塚古墳, 이바라키현) 등 일본에서 약 10가지 예가 발견되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한반도와 중국에서는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다는 점에서 일부에서는 일본 특유의 관 형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산광대식관에는 보요(步搖·떨잠·부인의 예장에 꽂는 비녀의 일종)가 약 80개 달려있는 화려한 관으로 이와 같은 규모와 장식을 가진 관은 당연히 가야, 백제 등 조선반도와 연관지어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후지노기 고분의 금동신발 전체에도 보요가 두루 장식되어 있으며 모두 두 켤레(4개)가 출토됐다.

이토 연구원의 주장은 왜 왕실에서 왕관을 사용한 역사적 사례가 전혀 없으며 보요 형식이 신라 금관 양식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후지노기 고분 출토의 금동관 역시 한반도에서 왜로 건너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이 관이 백제의 것인지, 아니면 가야나 신라의 것인지에 관한 연구는 현재까지도 논란에 휩싸여 있다. 
◇후지노기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 장식(왼쪽)과 이와 유사한 형태의 경주 천마총 출토 말안장 장식.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동제의 말안장 장식과 제작 형식이 매우 흡사한 후지노기 고분의 금동제의 말안장 장식에서도 고대 왜 왕실과 한반도의 긴밀한 연관성이 엿보인다. 이토 연구원은 “후지노기 고분의 말안장 장식 등 마구들은 어디에서 제작됐으며 어떤 위상을 지닌 인물이 소유했는가는 중점적으로 논의돼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을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지만, 설령 그 마구가 일본 내에서 제작됐다 하더라도 한반도계 도래인 중 기술인(工人) 집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가시와라 고고학연구소 부속박물관의 가쓰베 아키오(勝部明生)는 “후지노기 고분의 말안장 장식에는 인동문(忍冬紋, 인동초 무늬)이 숫자상으로 매우 많을 뿐 아니라 금수(짐승)의 몸에다 부착시킨 인동문이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면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동제 환두대도의 둘레에도 새의 몸에 인동문을 넣고 있어 서로의 공통된 장식 수법을 살피게 해주고 있다”(‘藤ノ木古墳鞍金具紋樣の考察’ 1988)고 주장했다. 그는 후지노기 고분의 말안장 장식에 있는 귀갑계문(龜甲繫紋)에 대해서도 “6세기 전반부터 백제 무령왕의 족좌(足座)와 환두대도 칼자루, 무령왕비의 목침은 물론 신라 장식총의 금동신발, 천마총의 말안장 장식, 가야월산리M1A호 고분의 환두대도 등에서도 발견되는 문양”이라고 설명했다. 
◇두 개의 산을 연결한 모양의 이산광대식관.(왼쪽)◇후지노기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으로 만든 신발.

피장자를 ‘백제왕족’이라고 단언한 이진희 교수와 더불어 교토부립대학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피장자가 백제 불교의 일본 포교를 맹렬하게 반대하며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가문과 싸웠던 조정의 모노노베(物部) 가문의 한 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가도와키 교수는 “모노노베 일족 중에는 조선반도에서 여러모로 활약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백제 불교를 수용한 진보적인 소가와 이를 반대한 보수적인 모노노베 가문 간 경쟁을 기록한 ‘일본서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면서 “모노노베 가문도 조선반도 출신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후지노기 고분 출토 유물은 조선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藤ノ木古墳の被葬者, 物部氏’ 1989)고 주장했다. 가도와키 교수는 교토부립대학 총장을 역임했던 일본 고대사 권위자로 그의 ‘모노노베 가문의 조선인설’은 당시 대내외 가장 유력한 학설이었다.

후지노기 고분의 석실은 1988년 일반에 공개됐다. 공개 첫날인 1988년 9월 28일 나라땅은 일본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각지에서 1만5000여명이나 몰려들었다. 한적한 이카루가 지역이 후지노기 고분으로 큰 장터처럼 발디딜 틈도 없이 북적댔다. 석실 입구에서부터 길게 줄을 선 참관객은 어두운 석실 연도로 들어서며 아주 잠깐 동안 붉은 석관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석관 외관만 바라보고도 관람자들의 표정은 석관처럼 붉게 상기됐지만 일본 당국은 석관 내부를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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