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작가와 화가가 함께 가는 新실크로드] ①시안에서 둔황까지

관련이슈 작가와 화가가 함께 가는 新실크로드

입력 : 2013-06-26 19:16:43 수정 : 2013-08-22 16:23:37

인쇄 메일 url 공유 - +

동서양 문명의 젖줄 실크로드…신라 경주로
신라 숨결따라 3만리 대장정 길 나서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을 잇는 문명의 젖줄이었다. 중국은 실크로드 동쪽 출발지가 시안이라고 주장하지만 기실 신라 경주야말로 찬연한 문명의 실핏줄이 연결된 시발점이었다. 작가와 화가들이 짝을 지어 그 길을 다시 찾았다. 박상우 이인, 성석제 최석운, 조용호 김선두, 권지예 황주리가 그들이다. 실크로드를 4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별로 2회씩 격주로 선보일 예정이다. 새롭게 톺아보는 실크로드의 여정과 화폭의 감수성이 기대된다.
화가 이인 형과 내가 한 조를 이루어 중국 시안(西安)으로 떠난 건 4월 15일 오전 8시30분이었다. 4개 조로 나누어 시안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대장정에 이인 형과 내가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할당된 코스는 시안∼란저우(蘭州)∼둔황(敦煌)∼류위안(柳園)∼투루판∼쿠차∼카슈가르∼우루무치∼시안으로 설계되어 대충 거리를 헤아려 보아도 약 1만㎞에 달하는 대장정 코스였다.

출발 이틀 전에 메일로 보내온 일정표는 예상했던 대로 가히 살인적인 강행군으로 일관되어 숙소보다 야간열차에서 보내야 하는 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고생이 여행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처지였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하물며 ‘해골의 길’이라고 불리는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을 향해 가는데 무슨 호강과 호사를 꿈꾸겠는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중국의 시안이 아니라 저 푸른 신라의 경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취지를 밝히는 일이 나에게는 당연한 일로 여겨져 심리적 부담감이 거의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 간의 교류가 원활했고, 혜초를 비롯한 구법승들이 이미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을 오간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실크로드에 관한 한 우리가 아는 것은 19살에 서역기행에 나선 혜초 스님 한 분과 ‘왕오천축국전’이 고작이지만 중국의 승려 의정삼장이 천축 순례승 56명의 전기를 집대성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보면 신라사람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를 위시하여 혜업법사(慧業法師), 현태법사(玄太法師), 현각법사(玄恪法師), 혜륜선사(慧輪禪師) 등등의 인물에 대한 전기가 등재되어 있다. 

경주에서 발견된 서역의 흔적들도 만만찮을 뿐만 아니라 향을 팔기 위해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에서 배를 타고 경주까지 오고 간 상인들의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 있으니 당시 신라의 국제적 교류에 관해서는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현재의 시점에서 정작 우리가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해야 할 것은 실크로드의 국내 행로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주∼서울∼평양∼베이징을 거쳐 당시의 장안이었던 시안으로 가야 올바른 재연이 이루어질 터인데 남북이 가로막혀 그것을 실연하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안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에게 우리는 당태종의 소릉(昭陵)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물론 당태종 묘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가면 볼 수 있다는 신라 진덕여왕 석상 때문이었다.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신라 진덕여왕의 석상 조각과 그의 직위를 새긴 명문 조각이 당태종 무덤 주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6년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들은 이 사실을 모두 크게 전하며 석상의 사진까지 게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힌 사람은 중국 산시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였는데 그는 논문에서 진덕여왕 석상이 소릉 부근에 도열한 이웃나라 제왕상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당태종의 소릉박물관에서 우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사진에서 보았던 석상은 박물관 실내에 전시되어 있지도 않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마당 한구석에 절반이 쩍 갈라진 채 여러 개의 다른 석상들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라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박물관 안내원에게 왜 이렇게 방치했느냐고 물었지만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박물관 학예사에게 정식으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리에 없다고 해서 도리 없이 현지 가이드에게 우리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열흘 뒤에 다시 시안으로 돌아오니 그때까지 이유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소릉을 떠나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개원문(開遠門), 요컨대 중국에서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낙타에 짐을 싣고 머나먼 실크로드로 출발하는 긴 대상행렬 조각군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이름을 ‘실크로드 기점군상’이라고 명명하여 그곳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고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신라의 경주가 출발점이라는 탐사목적을 가진 사람이니 그 순간 그 조각군상을 바라보는 심정이 미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에서 밀려든 문물과 동쪽에서 몰려든 문물이 모여 대당서시(大唐西市)를 이루었으니 당대에 이미 글로벌시티의 면모를 과시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크로드라는 유형무형의 문물 소통로가 바로 그곳을 기점으로 삼았다고 못을 박는 건 중국식 공정(工程)의 한 전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박2일 동안 우리는 옛 장안성의 풍모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시안 시내와 주변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그중에 우리의 실크로드 탐사와 연관하여 기록해야 할 곳은 대흥선사(大興善寺)와 흥교사(興敎寺)였다. 인도의 밀교를 그대로 전파한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대흥선사는 혜초 스님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돌아온 혜초는 50여년 동안 장안에서 머물며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고 천복사와 대흥선사에 머물며 밀교연구와 전파에 생애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궁중 원찰인 내도량에서 지송승(持誦僧)이라는 중책을 맡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흥교사에는 신라 왕손 출신으로 승려가 된 원측법사(圓測法師)의 탑이 있다. 실크로드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현장법사의 탑과 그의 두 제자였던 규기(窺基)와 원측의 탑이 같은 곳에 세워져 있다. 원측은 15세에 중국으로 가 장안에서 고승들로부터 불학을 공부한 뒤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법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제자가 되었다. 현장법사와 함께 중국 불교의 핵심인 법상종을 일으키고 경전 번역에도 큰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유식논서십권’ 같은 명저를 남긴 대학승으로 생전에 이미 생불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양귀비와 당 현종의 러브스토리가 깃든 휴양온천 화청지(華淸池),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둘러보고 우리는 밤 10시26분발 란저우행 밤열차에 몸을 싣고 시안을 떠났다. 4인용 침대칸에서 화가 이인 형과 나는 미지로 남겨진 일정표를 수도 없이 들여다보며 지레 겁을 먹었다. 열차칸에서 자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뒤를 따라 머나먼 파미르고원까지 가게 되어 있었다. 

새벽 6시40분에 간쑤(甘肅)성의 란저우에 도착, 현지 가이드와 접선해 우육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다시 황허강 상류의 유가협에 자리 잡은 병령사 석굴을 향해 출발했다. ‘병령’이란 티베트어를 음역한 것으로 ‘십만불(十萬佛)’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석굴도 석굴이지만 황허를 끼고 있는 그곳의 산수는 천하절경이라 그곳이 두 번째 방문인데도 나는 마냥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곳은 개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라 대불은 천막에 가려져 있었고 훼손 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곳곳의 동굴에도 작업대가 설치돼 있었다.

병령사 석굴을 둘러보고 다시 란저우로 돌아와 둔황행 밤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갔다. 이틀 연속 밤기차를 타려니 몸이 피곤해 역내의 편의점에서 이과두주를 사서 이인 형과 나눠 마시고 일찍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날 밝을 무렵, 차창 밖으로 드러나는 황막한 고비사막을 목격하고 알 수 없는 비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황사까지 드리워져 세상이 몹시 불투명해 보였다.

아침 7시50분경에 둔황에 도착해 아침식사를 하고 한 시간 동안 호텔방을 빌려 샤워를 한 뒤 곧바로 막고굴로 갔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말로만 듣던 막고굴의 현장성이 나에게는 감탄이나 공감이 아니라 비감과 울분을 자아내 새벽에 고비사막을 내다보며 느끼던 비감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막고굴은 한마디로 처참한 범죄의 현장이었다. 생존의 비감을 곱씹으며 동굴생활을 하던 숱한 화공들이 만들고 그렸을 엄청난 불상과 불화들이 외국의 도적떼들에게 약탈당한 채 처참한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러시아의 고고학자 올덴부르그, 미국의 고고학자 워너 같은 인물들이 엄청난 양의 보물을 약탈해 가 지금도 버젓이 자국의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니 ‘선진문명’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명사산과 월아천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울적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 투루판으로 가는 밤열차에서 고량주를 마시고 수첩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아, 실크로드는 사라지고 눈물사막이 열리는구나!

소설가 박상우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시’ ‘호텔 캘리포니아’ ‘사랑보다 낯선’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가시면류관의 초상’ 등을 펴냄 ▲동리문학상(2009), 이상문학상(2009) 수상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지수 '시크한 매력'
  • 지수 '시크한 매력'
  • 에스파 닝닝 '완벽한 비율'
  • 스칼렛 요한슨 '아름다운 미모'
  • 베이비몬스터 아현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