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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경주 남산서 14년째 머물며 작업하는 박대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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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15 09:35:06 수정 : 2013-01-15 09: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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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그림이 바로 현대미술… 이 시대의 추사·겸재 될 것”
경북 경주 서남산 솔숲 작업실에 14년째 머물며 작업하고 있는 박대성(68) 화백. 다수가 ‘현대회화를 그린다’는 명분으로 채색과 유화 쪽으로 몰려가도 굳세게 수묵작업만 고수하고 있는 그의 근황이 궁금해 전화를 했다. 경주가 아니라 서울이라며 반긴다. 얼마간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 머문다고 했다. 미국 뉴욕에서 돌아오자마자 경주로 내려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 세월도 많이 흘렀다.

장계향의 초상화 바탕작업을 하고 있는 박대성 화백. 그는 “공인의 초상화만이라도 극사실성과 정신적 기품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우리의 전통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던 시절 그는 돌연 뉴욕행을 결심했다. 모두가 ‘현대미술’을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 누구도 현대미술에 대해 시원스레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현대미술 메카인 뉴욕 소호에 1년간 머물며 몸으로 해답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수묵그림이 바로 현대미술’이란 깨달음이 벼락처럼 찾아들었다. 그 길로 짐을 싸 귀국해 경주로 스며들었다. “우리 미술의 ‘오리지널리티’(독창성)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감케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청자와 백자, 추사와 겸재의 작업들이 전형적인 모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은 1920년대부터 동양화란 말을 내세우며 아시아의 미술 맹주를 자처했습니다. 요즘엔 중국미술이 급부상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지요. 일본과 중국 미술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길은 우리의 ‘오리지널리티’지요.”

그는 자신의 사명이자 과제가 이 시대의 추사와 겸재가 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추사와 겸재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조선 중기의 걸출한 여인 장계향의 초상화 작업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비단에 아교칠을 하는 바탕작업이 한창이었다. 장계향은 한글 최초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남겼고, 임진왜란 직후 사방 100리의 굶주린 이들에게 죽을 끓여 구휼해 여성으로는 처음 ‘군자’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재령 이씨인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이기도 하다. 경북 영양 석포 재령이씨 집성촌에 그의 사당이 있다.

대담함과 섬세함이 어우러진 박대성 화백의 경주 남산 풍경.
“재령이씨 문중의 의뢰로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남성들이 경전을 통해 성인의 길을 찾던 시절에 여성으로 음식이나 자녀교육 등을 통해 성인의 길을 찾은 인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는 우리 전통 초상화의 독특한 제작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단순히 전통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서양화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교를 먹인 비단에 먹선을 그리고 분홍색 칠을 하게 된다. 칠을 마친 그림은 사실은 앞면이 아니라 뒷면이다. 비단 올 사이로 색이 비치도록 하기 위해 그림 뒷면에서 칠을 하는 것이다. ‘배채 기법’이다. 비로소 얼굴에 온화하고 섬세한 빛이 감돌게 된다. 안면근육의 조직과 피부의 살결을 따라 선과 점을 표현하는 조선 후기 초상화법인 육리문(肉理紋)법은 피부의 질감과 색감은 물론 땀구멍까지 되살려 낸다. 사실성의 극치를 추구하면서 정신적 기품까지 드러내게 된다.

“역대 대통령이나 공인들의 초상부터라도 이젠 전통기법으로 그리는 문화의식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문화, 더 나아가 국가경쟁력은 그런 인식에서 싹트는 것입니다.”

그는 서법을 먼저 익혀야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왕희지체 탁본 자료를 구하고 신라 김생의 글씨 등에 주목하던 그가 최근엔 글씨와 그림이 하나 되는 시원을 좇아 갑골문과 같은 상형문자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태고의 기세까지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기세 하나로 그림이 글씨가 되고 글씨가 그림이 되는 서화동원(書畵同原)의 경지다.

“서법이 꼼짝 못하는 법과 같은 것이라면, 그림은 큰 강물이 흐르듯 여유가 있고 규정된 법이 없지요. 기운생동이 여기서 나오지요. 옛 성인들은 경(經)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마음이 순화되고 나서 비로소 공부를 했지요. 경이 서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는 동굴벽화가 글씨(書)가 되는 과정을 ‘인류 최후의 디자인’이라 했다. 상형에서 글씨가 되는 과정을 거슬러, 글씨에서 상형이 되는 과정을 바둑 복기하듯 화폭에 나름의 방식으로 펼쳐내기도 한다.

“서양의 드로잉은 이 맛을 못 따라 오지요. 원초적인 것을 모르면 높고 깊이 못 나갑니다. 원시적인 원융을 만나야 합니다. 요즘 그림들이 뿌리 없는 허울 같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죠.”

그가 붓을 들었다. 붓을 곧추 세워 붓 털 하나하나에 긴장을 불어 넣었다. 중봉의 필법이다. 누에가 뽕잎을 먹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그의 이마엔 한겨울이 무색하게도 땀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 삭은 실에 연을 매달고도 끊어지지 않게 날릴 수 있을 정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단다. 자칫 감기가 들거나 몸살이 나기도 한다. 금방이라도 툭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필획은 그림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여기까지 오도록 수없는 세월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판소리 등 음악의 득음에 비유되는 ‘득필’의 경지라 감히 말해도 좋을 듯싶다. 겸재와 추사를 능가하는 명작을 남기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버티게 해 준 힘은 ‘불편함’이라 했다. 5살 때 빨치산 대원에 의해 부모를 잃은 그는 당시 대원이 휘두른 낫에 왼팔을 잃었다.

“되래 제정신을 맑고 바르게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이 됐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그림을 통해 몸의 불편에서 해탈하고 싶었습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 그는 주위의 모든 이들이 스승이 됐다. 심지어 하늘과 바람, 꽃과 나무도 스승이 됐다. 그는 우리 산천 예찬론자다.

“어느 나라에 가도 우리와 같이 작은 공간에 아기자기하게 산천이 고루 갖춰진 나라는 없습니다. 곳곳에 명산이 있어 산자수명하지요. 한반도가 엄청난 기운이 결집한 땅이라는 얘기죠. 우리 문화의 정신성도 걸맞게 같이 가게 돼 있습니다. 신라의 독창적인 불상과 김생 글씨도 그렇고 조선의 겸재와 추사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화를 우리의 고유색으로 완성하고 재창조하는 능력이지요. 이것이 한류 열풍의 바탕이 됐습니다.”

그는 가수 싸이의 우스꽝스러운 뮤직비디오가 세계를 강타한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싸이가 현대판 샤먼이기 때문이란다.

“사실 예술가는 희로애락을 버무리는 샤먼과 같은 존재지요. 그것에 충실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싸워 자신을 무너뜨려야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은 결국 누구나 나름의 구도의 길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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