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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는 배임죄 논란] (하) 시장경제와 '경영판단 원칙'-선진국의 배임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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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10-31 19:22:33 수정 : 2012-10-31 1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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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CEO ‘소신경영’ 땐 처벌 NO… 기업하기 좋은 ‘천국’
“미국에서는 노란 옷을 입은 직원만 골라 해고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요. 인종, 성별, 장애, 나이와 같은 차별금지 원칙만 어기지 않는다면요….”

미국에 진출한 한 한국 기업의 법률담당 간부의 말이다. 물론 이유 없이 노란 옷을 입은 직원만 골라 해고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미국의 제도를 말하자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유로운 기업활동이 일자리 창출과 사회·경제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은 선진국일수록 강하다. 미국뿐 아니라 독일, 일본에서도 기업활동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애를 쓴다. 유럽에서는 기업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규제 완화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대표적인 제도 중 하나는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이다. 이 원칙은 임원과 이사가 내린 결정이 손실로 이어졌더라도 ‘선의(good faith)’에 의한 것이었다면 소송이나 처벌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영진이 마음 놓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미국에서 기업경영의 본질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1919년 ‘도지(국내 브랜드명 닷지) 대 포드’ 소송에 대한 미시간주 대법원 판결이다. 대공황 직전 호황 속에 포드사는 당시 6000만달러를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놓고도 배당하지 않았다. 현재 가액으로 환산하면 40억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포드사 창업주 헨리 포드는 주주에게 배당하는 것보다 제품 가격을 낮추고 종업원 근무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1913년 포드사에서 독립한 후 포드사 지분 10%를 보유하고 있던 존 도지와 호레이스 도지 형제는 이에 소송을 냈다. 법원은 도지 형제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주주 이익 극대화를 기업의 최고 가치로 판단한 것으로, 미국 자본주의가 꽃피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미시간주 대법원의 판결과 함께 미국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다.

기업 활동을 감독하고 지시하도록 선임된 이사와 임원은 선의의 관리자로서 의무와 책임(fiduciary duty)을 지닌다. 회사의 이익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경영진은 늘 사업을 확장할지, 다른 기업을 인수할지, 자산을 팔지, 주식을 발행할지, 배당을 할지 고민에 부딪힌다. 다른 기업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에도 노출된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진이 법률적 책임만 생각한다면 판단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기업과 주주에게도 손해다.

경영진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최선을 다하도록 보장하는 제도가 ‘경영판단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판례로 확립돼 있다. 기업 임원이나 이사가 선의로 행동하고, 기업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판단했을 때 법적 책임을 물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된 예는 1945년 ‘오티스 앤드 컴퍼니 대 펜실베이니아 레일로드 컴퍼니’ 소송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티스 앤드 컴퍼니를 비롯한 주주 대표소송 당사자는 펜실베이니아 레일로드 컴퍼니 이사진이 유가증권을 거래하면서 투자사 한 곳과 거래하며 더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50만달러의 손실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연방대법원 1심은 “실수나 잘못이 반드시 이사와 임원의 부주의에 대한 책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며 “경영진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선의로 행동한 만큼 주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판시했다.

1985년 ‘스미스 대 반고콤’ 소송도 ‘경영판단 원칙’을 명료하게 규정한 사례다. 델라웨어주 대법원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반고콤 이사진이 ‘2시간 만에 주식매각 결정’을 한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없고(not interested)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판단했으며(informed decision) ▲성실하게 임했으며(in good faith) ▲회사 이익에 부합하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했기(rationally believe)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도 1993년 노무라증권이 도쿄방송과 특정금전신탁계약을 하고 자금을 운용하다 생긴 3억6000만엔의 손실과 관련해 주주가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을 적용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도쿄지방법원은 “기업경영 판단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적 판단”이라며 “회사에 손실을 가져왔더라도 그것만으로 책임을 물릴 수 없다”고 판시했다.

우리나라가 채택한 대륙법 체계를 탄생시킨 독일도 2005년 ‘경영판단의 원칙’을 도입해 배임행위 처벌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독일도 ‘적절한 정보에 근거하고, 회사 이익을 위한 합리적 방법으로 인정될 때’에는 회사에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배임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세계경제 위기를 맞아 미국에서는 “경영자의 자유로운 판단을 더 존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이를 기반으로 기업이익, 환경, 사회적 책임을 모두 만족시키는 ‘더블 보텀 라인(Double Bottom Line)’을 이루어나가는 데도 ‘경영판단의 원칙’을 확대해야 한다고 법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배임’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로운 경영판단이 기업을 번영시키고, 시장경제와 국민이 향유할 부를 증대시킨다는 생각에서다.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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