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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⑪뿌리 깊은 정쟁의 시작, 동서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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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4-22 22:25:05 수정 : 2008-04-22 22: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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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에 찢어진 사림파… 붕당정치 서막 열다

 

4·9 총선을 지켜본 많은 국민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당의 형태에 많은 실망을 했다. 모였다 흩어지기를 거듭했던 열린우리당은 도로 민주당이 되어 전선에 나섰고, 십년 만에 집권했다고 떠들썩했던 한나라당 진영은 친이와 친박으로 분열됐다. ‘친박연대’라는 특이한 이름의 정당도 생겨났다. 여기에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다가 자유선진당을 만든 이회창 총재까지 합하면 정당의 분열은 점입가경이다. 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친이’는 없다고 선언했지만, 한나라당 내부 분열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치사에서의 이런 분열은 정당사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조선시대 붕당정치가 그 원조쯤 된다.

# 사림파, 권력의 중심에 들어오다

16세기는 조선의 정치사에서 사화(士禍)의 시대로 정리된다. 네 번에 걸쳐 사화가 일어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림파는 작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사림파는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입지를 계속 확산해 나갔고, 1565년 문정왕후 사망 후 외척정치가 종식되면서 본격적으로 사림정치가 전개됐다.

특히 왕실의 방계에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명실상부한 정치 주도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선조는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사림을 가까이하고 공신과 왕실의 외척들을 배척하였다. 기묘사화 이후에 위축되었던 사림이 대거 정계에 진출했고, 을사사화 때 죄인의 누명을 썼던 노수신, 유희춘 등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 이제 역사 속에서 훈구파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일부 훈구파는 사림파로 전향했다. 역사상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선조 즉위 이후 사림파는 이제 재야 정치가의 입지에서 벗어나 중앙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이 집권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외척정치를 비판하는 비판자의 위치에서는 사림파가 한목소리를 냈지만 이제 정치 주도층이 되면서 학파의 성향이나 지역적 기반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현대사에 비유하자면 박정희의 유신정치, 전두환의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는 똘똘 뭉쳤던 김영삼과 김대중 세력이 군부독재가 사라진 이후 대통령이 되고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자 당을 달리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한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남인학파의 학문적 영수인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붕당정치의 서막, 동서분당

학파 간 분열의 조짐은 우선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와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 간에 나타났다. 1572년 노련한 정치인 이준경은 죽기 직전 조정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마찰을 계기로 완전히 당을 달리하는 분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72년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을 배운 영남학파의 학자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 역시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 출입한 학자로 1565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재였다. 

◇김효원의 문집인 ‘성암유고’.
그런데 당시 인순왕후의 아우였던 외척 심의겸은 오건의 추천을 거부했다. 심의겸은 윤원형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윤원형의 집을 방문한 김효원을 기억하고 그를 권신의 집에 드나드는 소인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잠시 들른 것을 우연히 심의겸이 목격한 것뿐이지 윤원형에게 줄을 대고 있던 식객이 아닌 게 판명나면서 김효원은 심의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74년 마침내 이조정랑에 임명된다. 이조정랑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인사권을 담당한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통칭하는데 직급은 낮았지만 관리들의 인사를 결정하는 요직이라는 점에서 청요직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관직이었다. 특히 전랑직은 자신의 후임을 직접 추천하는 자천권(自薦權)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김효원의 후임이 논의되자, 그 후임자로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역전되면서 이번에는 김효원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이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아우인 점을 들어 이조전랑과 같은 청요직을 외척에게는 절대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당론이 나뉘게 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주로 서울과 경기지역에 기반을 둔 기호학파의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척신 심의겸은 본격적인 사림정치가 구현된 시점에 부적절한 인물”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추는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이은 영남학파였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 근처)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지금의 정동)에 있다 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정치인의 동명을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람들을 ‘동교동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람들을 ‘상도동계’라고 부른 것과도 흡사하다.

◇북인 정파의 학문적 영수인 조식이 후학을 가르친 산천재.

#동인 내 남인과 북인의 분열

1575년 동서분당으로 붕당정치의 서막이 열린 후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일어나면서, 남명 조식 학파와 화담 서경덕 학파의 학자들은 이 사건에 연루돼 크게 희생됐다. 이 과정에서 이황학파는 남인, 조식학파는 북인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 후반 북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북인 간에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선조 후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의 분열이 일어났다.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나, 독주하는 과정에서 육북, 골북, 중북 등 북인 간의 내부 분열이 또 일어났다.

광해군 후반 대북 세력은 학문적 이념이나 정책의 수립에서 뚜렷한 색채를 내지 못하고 강경하게 반대파를 숙청하는 무리수를 뒀다. 그 결과 서인이나 남인 등 반대파 세력이 결집하게 됐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북인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북인의 비극은 권력을 잡는 것보다 지키는 게 훨씬 어렵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여실히 증명해준다.

1623년 정권을 잡은 서인은 형식적으로 남인과 연합정국을 구성하였으나, 인조대 이후 일시적인 기간만을 제외하고는 계속 집권층의 기득권을 누리면서 조선의 정치, 사상계를 주도해 나갔다. 특히 효종이 즉위하면서 북벌론을 국시(國是)로 하면서 성리학의 의리론과 원칙론에 충실한 서인의 입지는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선은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만을 강조하고 신흥 강국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외교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남인이 일부 견제 세력이 되기는 했지만 서인의 지나친 독주 속에 조선은 중국보다도 성리학의 이념만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국가로 접어들게 되었다.

◇조선 붕당정치는 김효원·심의겸 간 이조정랑 임명 논쟁에서 비롯됐다. 사진은 심의겸의 누이인 인순왕후와 명종이 묻힌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 내 강릉.

#붕당정치, 부정적으로만 볼 것인가?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당쟁으로 크게 비판한 쪽은 일제 관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붕당정치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했다. 폐원탄(幣原坦)과 같은 관학자는 ‘한국정쟁지’에서 “조선인의 오늘날 작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그 근원은 고질적인 당쟁이었다”고 주장하며 한국인의 분열적 속성이 당쟁에서 기인함을 노골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에는 현대의 정당정치처럼 특정 세력의 독주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긍정적인 요소도 발견된다. 각 붕당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붕당정치가 활발했던 시절에는 민란이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붕당정치가 대민 안정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 것이다. 붕당정치는 식민사관의 논리처럼 꼭 국력을 낭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정치 형태만은 아니었다.

최근 정당정치 전개에서도 한 당의 일방적인 독주보다는 건전한 비판세력의 존재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정당의 이합집산이 선거를 앞두고 당선을 위해 잠시 제휴했다가 또 갈라지는 행태라든가, 정책이나 이념의 비전 없이 지역색에만 편승하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조선중기 이후 정치사를 좌우했던 붕당정치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현대 정당사의 문제점을 단계적으로 극복해 나갔으면 한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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