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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52)조선을 움직인 10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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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2-30 21:02:57 수정 : 2009-12-30 21: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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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 해가 벌써 저물어간다. 이맘때가 되면 각 신문사나 방송사에서는 한 해를 대표하는 사건, 인물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하는 필자의 시각에서 500여년간 존속했던 조선시대 역사를 대표하는 10대 뉴스를 선정해 보았다.

① 훈민정음 창제… 백성들 문자에 눈을 뜨다

조선을 움직인 가장 중요한 사건을 선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1순위로 둔 것은, 한글은 세계에서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 중의 하나로 대한민국을 기억하게 하고 있고, 그 창제 동기와 시기가 밝혀져 있는 거의 유일의 문자라는 독창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수천 년 되었지만, 세종대왕 이전까지 우리글은 없었다. 그동안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고 글은 한자를 빌려다 쓰는 생활을 해 오면서, 백성들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종은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자음과 모음 28자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만들어져, 3년 동안이나 궁궐에서 여러 학자와 대신들이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았다.

그 결과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편리한 글임이 인정되어 온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특히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든 의미까지 밝혀 놓은 서문의 존재로 훈민정음은 더욱 빛이 났다.

그 속에는 세종의 자주정신, 애민정신과 함께 실용정신까지 녹아 있었다. 한자에, 알파벳 문자에 무엇 때문에 그 글자를 만든다는 명확한 목적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왼쪽)지난 10월9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훈민정음 반포 재현행사에서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 정인지가 올린 훈민정음 완성본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전남 여수 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에 복원·전시된 전라 좌수영의 모형.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좌수사와 수군통제사 등으로 근무했던 곳이다.
② 임진왜란의 발발… 팔도가 전쟁터로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총 20여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최초의 부대는 부산진을 침공한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였다.

초기의 전투에서 조선의 관군은 무참히 패배하였다. 4월 30일에 국왕인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점차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항쟁과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한 ‘불패의 장군’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활약 때문이었다. 의병과 수군의 활약은 바로 반격의 물꼬를 텄고 이후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휴전 회담을 깨고 1597년 일본이 다시 침략했지만(정유재란), 1598년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완전히 우리 국토에서 몰아냈다. 임진왜란은 승리한 전쟁이었지만 7년간 계속된 장기전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황폐, 인명의 희생, 문화재의 파괴 등 큰 손실을 입었다.

③ 삼전도 굴욕… 인조, 오랑캐에 무릎 수모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직접 이끄는 13만 청나라 대군이 조선을 침공하였다. 조선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50일가량 항전했으나 전세는 역부족이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의 수항단(受降檀:항복 의식을 하는 제단)으로 내려가 청 태종에게 항복 의식을 치르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전까지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지는 훗날 효종 시대 북벌(北伐) 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왼쪽)병자호란 때 인조와 조선 조정이 피난해 50일간 항전했던 남한산성 최근 전경.
◇(오른쪽)보물 제1560호인 ‘도성도(都城圖)’(18세기 말 제작,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④ 막 내린 고려시대… 태조, 한양 천도


1394년(태조 3) 10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했지만 새 나라에 걸맞은 도읍 건설을 추진하였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은 이미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으며, 특히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어서 수로 교통에 매우 편리하였다. 또한 주변에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국방상으로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태조가 ‘이곳의 형세를 살펴보니 왕자(王者)의 도읍이 될 만하다.

더구나 조운(漕運)이 통하고 사방의 이수(里數)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라고 말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읍지는 한양으로 정해졌지만 이때 왕궁을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왕사(王師)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였다. 무학이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자, 정도전은 국왕은 남면(南面)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1394년 10월 28일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한양 천도가 이루어졌다.

⑤ 영정조 시대, 정치·문화의 중흥을 맞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던 것에는 영조와 정조와 같이 뛰어난 왕이 연이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실시하여 정치, 경제적인 안정을 꾀하였으며, 1760년 청계천 공사를 단행하여 도시 실업자의 구제에도 나섰다.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를 이어 개혁정치를 수행하였다. 특히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를 통하여 조선의 농업, 상업, 과학, 국방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영조, 정조시대는 ‘속대전’, ‘속오례의’,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등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조선의 문예 부흥에 불을 지폈다.
◇(왼쪽)조선의 중흥을 이끈 영조 어진.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실시해 정치, 경제적 안정을 꾀했다.
◇(오른쪽)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를 통해 훈구파로부터 숙청된 조광조의 친필.
⑥ 4대 사화 피바람… 붕당정치의 시작


16세기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에서 비롯된 4대 사화(士禍)가 일어난 시기였다. 1498년의 무오사화, 1504년의 갑자사화, 1519년의 기묘사화, 1545년의 을사사화가 그것으로, 사화에서 사림파는 정치적으로 크게 탄압을 받았다.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등장하여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펼쳐보려다가 희생당한 사건으로, 사림파는 성리학의 이념을 중앙과 지방에 실천하려 하였다.

4번의 사화에서 사림파는 모두 패배하였지만, 사림파들은 지방에서 그 존재를 확인시켜 나갔다.

16세기 중반 선조 즉위 후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림파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붕당정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⑦ ‘진경문화’ 병자호란의 아픔 보듬어

18세기 이후 조선의 문화와 예술의 분야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세기 영·정조시대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유행한 남종 문인화를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추어 토착화하려는 화풍이 일어났으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그것이다.

청나라에 패배한 치욕을 문화적으로 회복하고, 그 문화의 중심은 명에서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조선중화사상이 진경문화의 유행에 큰 몫을 했다.

그림에서 진경문화의 주역은 정선이었다.

양반출신이었던 정선은 자신이 살았던 인왕산 등 서울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금강산의 모습 등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화원(畵員) 출신인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김홍도는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궁중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어 각종 궁중 풍속화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풍속화에 담았다.

대장간, 씨름, 집짓기, 추수 등 그의 풍속화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윤복은 부녀자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아 진경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왼쪽)진경산수 화풍을 활짝 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오른쪽)율곡 이이의 초상. 인조반정은 율곡 이이의 제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⑧ 인조반정, 사상계 회오리 일다


1623년의 인조반정은 북인을 축출하고 서인이 등장한 정치적 사건일 뿐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 사상적으로 기존의 사상적 다양성이 공존되던 시대에서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은 서인인 이이와 이항복의 문인인 김류, 이귀, 김자점, 신경진, 이괄 등이었다. 광해군 시절 정권은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를 기반으로 하는 북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권력에 소외되어 있었던 서인과 남인들은 북인들에게 커다란 정치적 불만을 가지면서 점차 세력을 결집하였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이들에게 주요한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정치, 사상계는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⑨ 세도정치의 전개… 제동걸린 개혁

1800년 조선후기 개혁정치와 문예중흥을 이끌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선의 중흥을 이끌던 개혁군주 정조의 급서는 이후의 조선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 왔다.

정조가 1800년 6월에 죽고, 11세의 순조가 뒤를 이으면서 시작된 영조, 정조와 같은 강력한 군주의 정치권력의 공백은 대왕대비와 외척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세도정치기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9세기 전반 어린 군주인 순조(1800∼1834), 헌종(1834∼1849)과,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1849∼1863) 등 허약한 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왕실의 외척 가문은 대왕대비나 왕대비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확고하게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국왕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정치가 소수의 외척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조선왕조는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특히 심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1811년의 홍경래의 난과 1862년의 임술민란을 야기시켰다.

◇(왼쪽)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가문의 득세로 군주로서 영향력을 단 한번도 발휘하지 못한 철종의 어진.
◇(오른쪽)조선 기록문화의 꽃이자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조선왕조실록.
⑩ 조선왕조실록 등 세계적 기록물 편찬


현재 대한민국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을 7건 보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의보감’, 조선왕조의 의궤(儀軌)가 모두 조선시대 기록물이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기록물 편찬의 전통이 뛰어났다.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쓴 일기 기록이며, ‘동의보감’은 불세출의 의학자 허준의 대표적인 의학서이다. 의궤는 조선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한 책으로 오늘날 왕실 행사 재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입장에서 조선을 움직인 10대 뉴스를 선정해 보았지만, 영광과 함께 수난의 역사도 많았다. 옛 역사를 거울삼아 그 시행착오들을 최소화하면서 보다 의미 있는 미래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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