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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의 길에서 만난 사람]스페인 비아나에서 만난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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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19 17:30:05 수정 : 2009-02-19 17: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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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길에서 마을은 사막의 오아시스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 물이 있고, 생명이 있고,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있다. 저 멀리 ‘비아나’가 보인다.
얼마 전 20년 만에 빈대가 출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발견된 장소는 외국인들이 머물던 다세대주택이었고, 빈대를 잡아온 30대 여성은 극심한 가려움증을 호소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빈대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벌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번에 발견된 빈대도 미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고, 유럽 역시 빈대가 흔한 곳 중 하나다.

빈대는 주로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곳에서 산다. 하지만 사람의 옷이나 가방에 옮겨져 집에 정착하기 때문에 청결과 상관없이 창궐한다. 필자는 유럽에서 별 네 개짜리 호텔에서도 빈대에 물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면 빠른 속도로 번식해 밤마다 사람을 괴롭히는데 그 가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필자가 프랑스 국경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이어진 순례자의 길을 걷던 중이었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기 때문에 청결상태가 좋지 않다. 당연히 빈대와 여러 해충들이 있었고, 이들은 순례자들의 지긋지긋한 길동무가 되었다.

필자 역시 며칠 전 알베르게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빈대에게 물려 허리 주변이 퉁퉁 부어 있었다. 걷는 동안 뜨거운 열기가 몸에 전해지면 가려움은 열 배가 되었다. 그렇게 걸어 비아나(Viana)에 도착했다. 전날 룸메이트였던 프랑스인 세 명과 함께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었다. 이 알베르게는 도네이션제로 운영되며 저녁식사와 다음날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떠나는 날 아침, 알베르게의 할아버지와 함께.
아름다운 발코니가 있지만, 꼭대기 방의 차가운 돌 위에 얇은 플라스틱 매트리스를 놓고 자는 검소한 숙소였다. 벌레 걱정에 일단 물티슈로 매트리스를 닦고 벌레 방지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리고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세탁기 사용법을 물으러 운영자인 할아버지가 계신 주방에 잠깐 들어갔더니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친구가 좀 있다가 올 건데 나보고도 함께하겠냐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시작했다. 상추와 토마토를 썰어 커다란 접시에 올려놓고 절인 올리브가 든 팩을 꺼냈다. 올리브와 올리브를 절인 식초를 함께 부은 후 넉넉하게 올리브 오일을 치고 소금을 조금 뿌렸다.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뒀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실 친구 분이 오자 미리 준비했던 빵과 수프를 낸다. 그다음 메뉴는 냉장고에서 꺼낸 샐러드. 메인 요리로는 생선 요리가 나왔다. 소박했지만 형식을 갖춘 코스다. 맛있다고 했더니 수줍게 웃으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귀여우시다. 고마운 마음에 설거지를 했더니 옆에서 손 닦을 수건을 들고 서 계시는 매너를 발휘하신다. 유교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에서는 할아버지라도 남자는 남자. 여성에게 정말 깍듯하다. 포만감에 부른 배를 안고 비아나 시내로 산책을 나갔다.

잠시 후, 알베르게로 돌아왔더니 룸메이트 순례자들이 모두 숙소 계단 밑의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빈대에 물린 상처가 좀 심각하게 부어올라 허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다들 눈이 동그래진다. 너무 심각해 보인단다. 아일랜드인이 자기가 크림을 갖고 있다면서 나눠 줬다. 일단 임시처방으로 바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약이 필요하다. 알베르게 할아버지에게 물린 상처를 보여주며 어떤 약을 사야 하냐고 물었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흥분한 어조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신다. 괜찮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팔을 끌고 광장으로 나갔다.

먼저, 광장 옆의 바에 가서 바 주인에게 허리를 보이신 후 호들갑스럽게 큰 소리로 무언가를 의논했다. 바 주인도 심각한 얼굴을 하며 주변의 손님들에게 얘기한다. 그렇게 허리를 보여주고(?) 음료수 한 잔을 얻어 마신 후 이번엔 광장 중앙의 노천카페로 끌려갔다.

할아버지의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고, 또 허리를 보여주며 큰 소리로 아까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필자의 얼굴은 금새 빨개졌다. 대낮에 노천광장 한가운데서 다 큰 처녀의 허리를 들추며 큰 소리로 동네방네에 벌레에 물렸다고 말하시다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잠시 후 할아버지의 호들갑 덕분에 예약 없이 병원에 갈 수 있었고 대기시간 없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료를 받는 내내 엄마처럼 함께했다. 의사는 부은 자국을 보더니 ‘인섹토 알레르히야(벌레 알레르기)’라고 했다.

의사는 빈대 물린 데 바르는 크림과 먹는 약 처방을 내렸다. 이후에도 어찌나 할아버지가 딸처럼 신경을 써 주시는지 너무 고마웠다. 떠나는 다음날엔 배웅해주시는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빈대에 물린 상처는 6개월이 넘게 갔지만, 덕분에 잊지 못할 비아나 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가 생겼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건강하게 비아나에서 순례자들에게 자원봉사를 하고 계실 터다.

그리고 조언컨대 여행 중에 벌레에 물린 적이 있다면 옷은 뜨거운 물에 세제로 빨고, 모든 짐을 햇볕에 말리는 것을 잊지 말자. 자칫 잘못하면 한국으로 빈대를 옮겨와 해충 방지 서비스를 받아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여행작가 (www.prettynim.com)

# 여행정보

순례자의 길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시작되나 한국 여행자들은 대부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있는 생 장 피드포르(St. Jean Pied-De-Port)에서 출발한다. 이곳에서 목적지인 산티아고까지는 도보로 약 한 달이 걸린다. 항공을 이용해 파리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며 대한항공, 아시아나 등의 직항이 있다. 파리에서 생 장 피드포르까지는 6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주간열차와 10시간30분이 소요되는 야간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비아나는 일주일째 되는 날 도착하게 되는 작은 마을이다.



# 비아나(Viana)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미노 데 산티아고(El Camino de Santiago, 순례자의 길)’에 있는 작은 마을로 북부 스페인의 나바라(Navarra)주에 속한다. 순례자의 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자 첫 순교자인 야곱을 기리며 걷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은 유럽 전역에서 스페인의 서북쪽 끝인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데, 그곳에는 야곱의 무덤이 안치된 산티아고 대성당이 있다. 과거엔 종교적인 이유로 걸었지만, 현재는 스페인의 문화와 자연을 즐기거나 스포츠로 걷는 사람도 많다. 매년 전 세계에서 10만여명이 이 길을 걷고 있고, 최근 도보여행 붐으로 한국인은 2006년 66명, 2007년 423명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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