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8>백제 고승 '혜총'이 세운 구다라산 조에이지(百濟山 長榮寺)

관련이슈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입력 : 2008-10-15 09:57:01 수정 : 2008-10-15 09:57:0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백제인 숨결 오롯이… 오사카일대 영향력 커
◇조에이지 정문
일본 오사카 땅은 4세기부터 수많은 고대 백제인들이 집단적으로 계속 건너와서 발전시킨 터전이다. 오사카시립대학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고대 일본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조선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이룩한 공적은 매우 크다”며 “특히 기나이(畿內)지방(오사카, 나라, 교토, 효고현 등)에서 도래인들의 활동은 수많은 역사 자료가 상세하게 입증하고 있다”(‘古代日本と朝鮮中國’ 1988)고 했다. 이들 지역 중 오사카 지역은 광대하지만 곳곳에서 백제인의 흔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동부 오사카의 ‘구다라산 조에이지’(百濟山 長榮寺)도 고대 백제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명찰이다. 구다라산 조에이지의 경우 4세기부터 난바(難波)에 진출한 고대 백제인들이 구다라노(百濟野)를 거쳐 다시금 동쪽으로 확장되어 가던 길목에서 생겨난 명찰이다.
◇ 조에이지 삼면대흑천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스카시대(592∼645) 백제 불교를 번창시킨 백제 왕족과 건축가, 승려들이 나라 땅 아스카에서 아스카데라를 세웠다. 그 직후에 오사카 난바 남쪽에 바로 잇닿은 곳에 사천왕사와 백제사를 지은 다음, 다시금 아스카로 향해 가는 오사카 동쪽 지방 구다라산에 조에이지를 세웠다. 이 사찰 건축에 앞장선 사람은 스이코 여왕(592∼628 재위)을 등극시킨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생년 미상∼626) 대신이었다.”(‘飛鳥の古代を考える’ 1995)

구다라산 조에이지의 문서에는 스이코 여왕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574∼622)가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히가시오사카의 구다라산 조에이지는 쇼토쿠 태자가 개창했으며 본존 불상인 ‘11면관세음’은 태자가 몸소 만든 것이라고 전하듯이 영험(靈驗)이 뚜렷하다. 처음에 백제국에서 귀화해 온 법사가 주지로 공양하게 돼 구다라산이라는 칭호가 생겼다. 간에이(寬永, 1624∼1644) 시절에 공고산 조쇼방(金剛山長床坊)의 승려 후미오리(文織)가 사찰을 중흥시켰고, 뒤이어 간엔(寬延) 원년(1748년)에 시운존자(慈雲尊者)가 정법률(正法律)의 근본 도량으로서 사중을 섭화시켰다. 그 이후 계속해 고승이 배출됐다.”(‘史蹟長榮寺’)

아스카시대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스이코 여왕과 쇼토쿠 태자, 소가노우마코 대신이라는 왕실 세 지배자의 삼두마차가 조에이지를 창건하는 데 앞장선 것을 구체적으로 살피게 해준다. 물론 최초의 주지는 백제인 고승이었다. 지난 날(1996년 3월) 필자를 처음 이곳으로 안내한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이 사찰 최초의 백제인 고승은 그 당시 아스카데라에 와서 살며 쇼토쿠 태자에게 불경을 가르치던 태자의 스승 혜총(惠聰)이었다”고 했다. 일본 고대 불교왕조사인 ‘부상략기’에 보면 스이코 여왕 3년 5월에,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 승려 혜총이 왕실 조정에 건너와 불교를 펼쳤으며, 아울러 삼보(불·법·승)를 받들게 했다. 두 승려는 호코지(法興寺, 지금의 아스카데라 터에 일본 최초로 백제 건축가들이 696년 창건한 7당 가람, 필자 주)에 들어가서 살았다”(‘扶桑略記’)고 했다.
◇ 조에이지 쇼토쿠 태자 개창비

따라서 가도와키 교수는 “백제 승려 혜총이 당시 최고 대신이었던 백제인 권력가 소가노우마코 대신으로 하여금 ‘조에이지’를 백제 건축가들이 짓게 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특히 가도와키 교수는 “소가노우마코의 가문은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관리 목만치(木滿致, 4C)의 직계 후손이다”(‘飛鳥’ 1977)라는 사실을 일본 NHK방송에서 직접 강연해 사실을 밝힌 사학자이기도 하다.

소가노우마코 대신의 친누이 두 사람은 각기 차례로 왜 왕실 제29대 긴메이왕(欽明, 572∼585 재위)의 왕비가 됐고, 소아마자 대신의 아버지 소아도목(蘇我稻目, 생년미상∼570) 대신의 시대부터 이미 조정 권력을 장악했다. “제29대 긴메이천황(欽明)은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이었다”(小林惠子 ‘百濟王聖王は欽明天皇だつた’, 1991)고 저명한 일본 사학자가 주장하듯이, 그 무렵 6세기 아스카왕실은 백제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소가노우마코 가문의 전성기였다. ‘조에이지’ 창건은 스이코 여왕과 쇼토쿠 태자, 소가노우마코 대신 등 조정의 삼인방 실세의 소산이었다고 본다.

이 사찰에서 오늘날 가장 중시하고 있는 법당은 ‘시운존자 개산당’(開山堂)이다. 18세기 중엽에 불법의 정법률 근본 도장을 설치하고 가람을 중흥시킨 시운존자에 대한 드높은 존경심이 잘 나타나 있다. 경내에는 대형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삼면대흑천상과 홍법대사 동상 등이 도처에 크게 자리해 옛날부터 동부 오사카 일대의 영향력이 큰 사찰임을 상기시킨다. 이 사찰(東大阪市高井田元町1-11-1)이 고대에 웅장한 백제인의 가람이었음을 살피게 하는 것은 현재도 여러 개의 법당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조에이지는 두 개의 전철 노선의 역사가 동시에 50m밖에 안 되는 위치에 서로 버티고 있다. 전철만 타면 누구나 찾아가기 쉽다. 즉 히가시오사카 전철의 JR가와치 에이와역 또는 긴테쓰 가와치 에이와역에서 내리면 된다. 조에이지는 서쪽으로 큰 도로 건너 100m 미만의 도로 안쪽 터전에 위치한다. 더구나 찾기 쉬운 것은 큰 도로 횡단보도 건너 마주 보이는 약 40m 지점의 가모다카이다신사(鴨高井田神社)라는 사당 정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에이지 시운존자당 존자상

조에이지는 바로 이 사당 옆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따지고 볼 것도 없이 이 가모다카이다신사 역시 이 고장에 살던 고대 백제인들의 터주신이 되었던 나가타노 오미(長田使主)의 사당이었다는 사실을 가도와키 교수가 필자에게 설명했다.

“이 지역 일대에는 백제 도래인으로 유명한 고관 나가타노 오미의 후손들이 살았습니다. 실은 이곳 가모다카이다신사의 신주는 본래 나가타노 오미를 신주로 모시고 제사 지내왔습니다. 이 고장 일대에는 지금도 백제인 후손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 고장이 현재(1996년 3월, 필자 주)처럼 도시화되기 이전인 일제 치하에는 큰 농장 경영자인 백제인 부호 구다라노 쇼치(百濟松治)를 비롯해 많은 백제 왕족 후손의 유력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 조에이지 북향연명지장존

그러나 현재는 본래의 사당 신주인 백제 왕족 나가타노 오미의 신주를 모신다는 말 대신에 “오진천황(4∼5C)과 그의 모친 진구황후(神功皇后)를 제사지낸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오진천황은 백제에서 도래한 백제 곤지왕자이다”(石渡信一郞 ‘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는 연구가 있으니 여하간에 다행스럽다.

이 고장 예전 문헌에도 보면 “다카이다(高井田) 지역 일대에는 지배자였던 백제에서 도래한 나가타노 오미의 후손들이 살아왔다”고 한다. 나가타노 오미에 관해서는 일본 고대의 왕 귀족 가승인 족보 ‘신찬성씨록’(815년 왜 왕실 편찬)에 백제 왕족으로서 기사가 전해 온다. 즉 그 내용을 요약하면, “나가타노 오미는 백제국 군왕(君王)의 후손이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지역 군수를 지낸 백제 왕족 나가타노 스구리(長田村主)도 역시 ‘신찬성씨록’에 그 발자취가 백제 왕족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이 고장에 터잡았던 “고대 백제 도래인들은 조에이지이며 가모다카이다신사를 받들면서 나가타노 오미와 나가타노 스구리 등 밑에서 널리 번창했다”(家永逸郞 ‘東大阪記文’ 1942)고 한다.

이와 같이 조에이지, 가모다카이다신사와 더불어 이른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조상신(祖上神)과 부처를 공동으로 신앙했던 고대부터의 이 고장 백제계 후손의 모습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이곳 히가시오사카 일대의 백제인 등 고대 한국인들의 활약상은 계속 탐구할 만하다고 본다.

실은 이 고장 히가시오사카 다카이다의 동쪽으로 뻗어나간 지난날의 후세시(布施市)의 오아사나가타(大字長田) 지역에도 역시 백제왕족 나가타노 오미를 신주로 모시고 받들어 왔던 사당이 있다. 이름하여 ‘나가타신사’(長田神社)이다. 그러나 이 신사에서도 약속이나 한 듯 역시 나가타노 오미의 신주는 바뀌고, “오진천황과 그의 모친 진구황후를 제신으로 받들고 있다”고. 이와 같은 경향은 이미 일제 군국주의 치하로부터의 관행이라는 것이 뜻있는 일본 사학자들의 통설이다.

그러나 나가타노 오미뿐 아니라 수많은 도래인 후손들은 오늘날 완벽한 일본인이 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해마다 10월이면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에서 열리는 ‘백제문화제’(올해는 제54회, 10월3∼12일)에 수만명을 헤아리는 일본인이 일본 각지에서 조상의 나라를 찾는 실정이다. 리쓰메이칸대학 사학과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교수는 ‘일본서기’ 역사책의 잘못된 내용을 밝힌 연구론 ‘오진천황기(應神天皇紀)의 검토 1979’에서 지적하기를 “6세기의 왜나라 왕권은 백제 오경박사이며, 백제 지배자의 일본 도래에 따라 백제에서 계속 선진적인 문화를 도입하게 됐다”고 했다는 것을 아울러 덧붙인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