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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6>오사카 '행기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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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9-17 11:03:41 수정 : 2008-09-17 11: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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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역에 300여개 다리 놓은 행기스님 업적 기린 기념 교량
◇오사카시내 야마토가와를 가로지르는 행기대교. 일본전역에 크고 작은 교량 300여개를 건설한 백제인 고승 행기 스님의 업적을 기려 이같이 이름지었다.
오사카 시내 미나미구다라소학교에서 남쪽으로 4km 쯤 떨어진 곳으로 강물(大和川)이 시가지 한복판을 시원스럽게 가르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 강가에는 눈길을 끄는 큰 다리가 걸려 있다. ‘행기대교’(行基大橋)이다. 이 대교는 일본의 8세기 나라시대(奈良, 710∼784)의 백제인 고승 행기(行基, 668∼749) 스님을 추모하는 기념 교량이다. 행기라는 백제인 스님은 1260년 전에 이승을 떠나갔으나 행기대교 하나만 보더라도 그의 명성은 짐작할 만하다. 그의 행적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 논문은 1000편 이상이라는 게 일본 고대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행기 스님의 무덤에서 파낸 그의 전기 ‘대승정사리병기’.

불교 사학자들은 물론 고대사학자 역시 행기 스님에 관한 연구론이 없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오사카 출신의 위인 행기를 추모하는 오사카 사람들의 정은 행기대교를 통해 드러난다. 오사카 사람들은 행기대교를 그의 탄생지인 오사카의 명물로 지금도 변함없이 기념하고 있다.

행기대교를 쉽게 찾아가려면 오사카 시내의 ‘킨테쓰 전철’(미나미오사카선)을 타야 한다. 이 전철의 ‘야다’(矢田)역에서 내려 남쪽 방향으로 주택가 큰 도로를 따라 곧바르게 도보로 약 30분 걸으면 강변에 이르게 된다. 야다역에서 전철을 내려 찾아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강변에 닿으면 오른쪽으로 우회전하는 강변 도로를 따라서 200m 정도 다시 올라가면 저만치 행기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강변 경치도 차분한 분위기 속에 은은하게 아름답다. 지난날 행기 스님의 눈부신 업적을 연상하며 걷기에 매우 좋다고 해둘까. 다리가 없어서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먼 길을 끝도 없을 정도로 돌아다녀야만 했던 불쌍한 이 고장 사람들을 위하여 큰 다리를 놓아주었던 사람이 행기 스님이다. 그가 일본 전국에 앞장서 건설해준 크고 작은 다리는 무려 300곳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교량은 제45대 쇼무왕(聖武, 724∼749 재위)의 간청으로 건설했다고 하는 교토 지역의 교닌교(恭仁橋, 741년)다.

사학자 노무라 히데유키(野田秀行)는 “행기대교도 실은 그 옛날 이 고장 구다라노(百濟野) 들녘에서 8세기 초엽 고통받던 농민들을 위해 행기 스님이 놓았던 큰 다리 터전이다. 근세에 홍수로 떠내려갔던 옛날의 다리를 복구하면서 행기 스님을 추모하여 다리 명칭도 현재와 같이 ‘행기대교’라고 이름지어 만든 것이다. 그의 탄생지는 ‘행기대교’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사카이(堺)의 쓰쿠노(津久野)역 인근의 에바라지(家原寺)이다. 쓰쿠노역은 오사카의 JR전철의 덴노지(天王寺)역에서 한와선(阪和線) 전철을 타면 찾아가기 쉽다.

행기는 8세기 초에 오사카의 바닷가 사카이에서 태어나, 장차 왜 왕실의 조정 최고 대승정(大僧正)이 된 인물이다. 행기 큰스님은 가장 불우한 중생들을 자비와 자선으로 최선을 다해 보살피며 불교 문화를 꽃피운 당대의 살아있는 보살이며 성인(聖人)이었다. 그러기에 일본 불교와 고승을 논할 때, 백제인 행기 대승정을 빼놓을 수 없다.

◇행기대교 인근의 전철 ‘야다’(矢田)역 표지판


나라(奈良) 땅의 거대한 가람은 널리 알려진 ‘도다이지’(東大寺, 이하 동대사)다. 이 동대사를 짓는 데 앞장서서 높이 16m 이상인 세계 최대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을 만들도록 앞장서서 전국의 불교 신도들을 이끈 지도자도 행기 스님이다. 의아한 것은 오늘날 동대사에서 나눠주는 선전물에는 어쩐 일인지 그 행기 큰스님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사찰의 고대 역사서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 전10권, 1106)에서는 행기 큰스님을 “동대사 창건에 앞장선 성인이다”고 추앙하고 있으나 후세의 동대사 승직자들이 그런 위인을 외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쇼무천황(聖武, 724∼749 재위)은 나라 땅에 동대사를 건립하면서 행기스님에게 비로자나대불을 만드는 데 적극 협조해 주기를 간청했다”(‘東大寺要錄’)고 할 만큼 행기 스님의 영향력은 8세기 일본 불교계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막강했다. 그러기에 행기 스님은 78세 때인 745년, 쇼무왕에 의해 일본 최초의 대승정으로 추대됐다. 쇼무왕은 또한 그 이후 4년 만인 749년에 이르자 행기 스님 앞에서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왕위를 딸에게 넘긴 다음 출가해 승적에 들었다. 그러나 그 해 행기 스님은 82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일본 불교는 서기 538년부터 백제를 모태로 발생했다. 그후 일본 불교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이 행기대승정이다. 행기 스님은 백제인의 피를 이은 한국인이면서도 일본 고대 불교 최초의 ‘대승정’이 된 고승이다. 그러나 행기 스님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일본 학자들은 중세(中世)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행기 스님에 관해 연구해 왔다. 일본 학자들이 논문과 저술을 통해 수많은 연구를 해왔던 것이기에, 어쩌면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행기 스님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는 동안, 엉뚱한 일인 학자들이 등장하여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펼치기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행기 스님이 백제인 왕인(王仁) 박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불교사학자가, 뒷날에 가서는 슬며시 백제인 혈통을 논술에서 빼버리고는 중국인의 피가 담긴 것으로 숨겨버렸다. 그 예를 한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행기보살좌상’ 목조. 높이 83.3cm


불교사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薰) 교수는 도쿄대학 국사학과 출신으로 오사카대학 교수와 나라대학 교수 등을 지낸 문학박사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행기 스님 연구서를 처음 쓴 것은 1959년이었다. 그는 이 저서(井上薰 吉川弘文館, 1959)에서 행기가 백제인 왕인 박사의 후손이라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행기(行基)는 덴치(天智)천황이 오우미(近江)의 오쓰궁(大津宮)에서 즉위한 해(서기 668년)에 가와치(河內)의 오토리군(大鳥郡, 지금의 오사카의 사카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지재지(高志才智)이고 어머니는 봉전씨(蜂田氏)였는데, 고지 씨는 왕인(王仁)의 자손이라고 한다.”(‘大僧正舍利甁記’)

그러나 그후 21년이 지난 1980년에 쓴 다른 글에서는 백제인 왕인의 후손 소리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면서 다음과 같이 중국 계열인 것처럼 돌려버렸다.

“행기(668∼679)는 덴치천황 7년에 가와치 오토리군의 어머니쪽 외가에서 태어났다. 에바라지 터는 본래 어머니쪽의 집이었던 것을 행기가, 서기 704년에 사찰로 바꾼 곳이었다. 아버지는 고지재지(高知才智)이고 어머니는 봉전씨(蜂田氏)이며 고지(高志)·봉전(蜂田)씨는 한계(漢系)의 도래이다.”(井上薰(‘古代史の群象’ 創元社 1980)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처럼 21년만에 백제인을 중국인으로 국적을 바꿔놓았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시 일본의 반한 세력으로부터 협박이라도 당했다는 것인가. 그 무렵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백제 왕실로부터 칠지도(七支刀)가 아랫사람인 일본 왕실로 전수되었다”(‘七支刀の傳世’ 1976)고 하는 내용의 올바른 칠지도의 명문을 풀이한 연구론을 발표한 뒤, 반한 세력 청년들이 자택으로 과자상자를 들고 찾아와서 협박했다고 필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일이 있다. 즉 그들은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에게, “박사님, 이번에는 과자가 들어 있지만 다음에는 딴 것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 과자가 아닌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것조차 없겠다.

◇행기 큰스님 탄생지 오사카 사카이항 경관.


‘대승정사리병기’는 행기 스님의 무덤에서 파낸 사리병 속에서 나온 옛날 기록이다. 이 고대 기록에서 행기스님의 생부가 왕인 박사의 직계 후손인 것이 밝혀졌다. 그뿐 아니라, 일본 고대의 가장 중요한 불교사이며 ‘역사의 명저’(名著)로 평가되고 있는 고승전(高僧傳)인 ‘원형석서’(元亨釋書)에서도 행기 스님은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이며 백제의 왕손임이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도 있다.

“釋行基. 世姓高志氏. 泉州大鳥郡人. 百濟國王之胤. 天智七年生……”(虎關師鍊, 1278∼1346)

“행기는 스가하라지(菅原寺)에서 몸에 병이 나서 2월 2일(749년) 밤에, 임종에 처해서 특히 제자 광신(光信)에게 떠맡겨 이 사찰의 동남원(東南院)에서 타계했다(‘大僧正舍利甁記’ ‘行基年譜’). 8일에 유언에 따라 제자들은 야마토의 헤이구리(平群)에 있는 이코마산(生駒山)의 동릉(나라 서쪽 10km에 위치)에서 유체를 화장했다. 행기 스스로 화장할 것을 유언한 것은 그의 스승인 도소(道昭) 스님을 따른 것이리라(필자 주: 도소 스님은 행기의 스승으로서, 행기 스님이 18세 때 그 문하에 들어가서 참선했다) 제자인 경정(景靜)은 화장한 유골을 주워서 사리병기에 담았으며, 산 위에다 묘지를 마련했고, 제자 진성(眞成)은 사리병 속에다 행기의 전기(傳記,‘大僧正舍利甁記’)를 새겨서 이것을 묘지에 묻었다. 묘지는 지금의 지쿠린지(竹林寺)이다.”

행기 스님이 백제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일본 고대의 가장 오래된 불교 전적으로 손꼽히는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도 여러 대목이 일화와 함께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이 ‘일본영이기’에는 야쿠시지(藥師寺, 나라땅) 사찰의 경계(景戒) 스님의 저술로서, 서기 787년에 처음으로 집필된 고전이다. 또한 이 책에는 행기 스님 이외의 여러 사람의 백제 고승들의 일화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일본 최초의 불교 자선 사회사업가 승려로 살아있는 보살의 대명사를 홀로 누린 큰 인물이 백제인 행기 큰스님이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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