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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5>오사카 심장부 난바(難波)와 백제(구다라·久太郞), 도톤보리(道頓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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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9-03 10:18:37 수정 : 2008-09-03 10: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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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에서 온 것이구나"
◇규다로(구다라) 거리.
일본 오사카와 백제는 어쩔 수 없이 끈질긴 인연을 가진 것 같다. 오사카 땅에서 한자어로 백제를 가리키는 표현은 고대부터 구다라(百濟·백제)였다. 고대 일본에서 백제인 왕인(王仁, 5C) 박사에 의해서 한국 고대의 이두(吏讀)처럼 처음 만들어지게 된 이두적인 한자식 표현을 가리켜서 ‘만요가나(萬葉假名)’라고 부른다. 가쿠슈인대학 국문과 오노 스즈무(大野晉) 교수는 “만요가나 등 일본어의 한자어 표기는 서문수(西文首, 가와치 왕실 교육장관)였던 왕인과 아직기 등이 실행했다”(‘日本語の世界’[1] 1980)고 단언했다.

한자어의 만요가나로 고대의 오사카를 구다라스(百濟洲, 백제나라)로 불렀던 당시, 구다라스의 중심지는 역시 백제 지명(地名)의 행정 지명을 가진 곳인 구다라스(百濟洲)와 구다라리(久太良里)라는 고을 지역이었다. 고대 오사카 땅에 구다라리 행정 지명이 처음 보이는 때는 910년 전인 11세기였다. 오사카의 고지도 ‘난바팔랑화도’(難波八浪華圖, 1098년 제작)에 있는 것을 필자가 알아냈다.

현재는 만요가나의 일본어 발음인 ‘백제’라는 ‘구다라리’를 현대식 일본어로 발음하여 본래의 이미지를 바꾼 ‘규다로 마치’(久太良町)라고 고쳐부르고 있다. ‘구다라’를 ‘규다로’라고 고쳐 부른 것은 군국주의 일제 치하부터다. ‘난바팔랑화도’에 보이듯이 ‘구다라리’(久太良里)의 이두식 한자어 지명인 구다라(久太良)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시는 분도 없지 않겠지만 이 구다라 거리를 지나다닌 재일동포나 한국 관광객들에게 그 지명의 발자취를 여기 굳이 지적하여 둔다.

백제를 일컫는 구다라(久太良)라는 이 행정 지명을 가진 지역은 현재의 오사카시 주오구 규다로(久太良) 1가로부터 규다로 4가까지의 넓은 터전이다. 이와 같이 오사카 중심지에 이 구다라 글자를 쓰는 거리는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9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큰 터전을 차지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고대 백제인 왕족 나리야스 도톤(成安道頓)이 주도해 만든 구다라스 ‘도톤보리(道頓堀)’의 오늘날 번화가 경관.

좀더 이 지역을 살펴본다면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오사카 중심지로 이름난 난바(難波) 지역 일대에는 도톤보리(道頓堀)와 고라이바시(高麗橋), 신사이바시, 구다라 등 번화가들이 줄지어 있다. 그런가 하면 오사카시청과 주오구청 등 중앙 관청들도 모두 이곳에 이웃하고 서 있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고대 왕궁 터전인 ‘난바궁’(難波宮) 유적지도 있어서 고대 백제계 왕실과의 연고를 능히 추찰할 수 있다고 본다.

오사카의 이름난 번화가 도톤보리의 지명을 잠깐 살펴보자. 도톤보리 역시 백제인의 이름에서 유래된다는 것을 사학자 무라다 다카시(村田隆志)씨가 다음처럼 지적했다. 백제 왕족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의 후손 일곱 명가(名家)들 중의 한 가문은 나리야스가(成安家)인데, “나리야스 가문에서도 유명한 인물은 나리야스 도톤(成安道頓)이다. 나리야스 도톤은 ‘도톤보리’ 운하 개설을 담당했던 이 지역 원님(奉行, 최고위 행정관)으로 운하 공사를 직접 지휘했다. 1615년에 도톤보리가 완성됐다. 간혹 야스이 도톤(安井道頓)이라고 잘못 전하기도 한다”(‘杭全神社境內史蹟散策’ 2005)고 밝혔다.

더 밝힐 것은 이곳 주오구 번화가로서 규다로마치 바로 위쪽으로 고라이바시가 잇닿으며 고라이바시 1가에서 4가까지가 있다. 고라이바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백제 핏줄인 ‘고구려 다리’라는 지명이고, 실제로 고라이바시라는 큰 다리도 1가에 있다. 고대에 이 지역에는 고구려에서 건너 온 주민들이 백제인들과 이웃하여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오사카 중심 번화가인 난바 지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난바는 일찍이 일본어학자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 교수가 1925년 9월 처음 편술한 대형 일본어사전(廣辭林, 본문만 총 1936쪽)에서 “오사카의 옛 지명이며, 즉 왕인이 지은 ‘난파진가’(難波津歌)에서 처음으로 지명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사전에서 일본 최초로 지은 왕인의 ‘난파진가’의 시가(和歌)를 모두 예시했다.
◇난카이 난바역 입구.

현대 ‘일본어대사전’(1992년, 講談社)의 ‘난바’ 항목에는 백제인 왕인 등에 대한 언급은 없고, “아스카 시대에 난바에서 개항된 오사카에 면한 바다의 옛 지명의 항구. 대륙으로 통하는 중요한 선착장으로 번창했다”고만 썼다. 현재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바닷가가 아닌 간척된 오사카의 중심 번화가로 변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4∼5세기에 백제인들이 이곳으로 진출하여 오던 당시는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바닷가 나루터였다. 그 후 왜 왕실로 건너온 백제학자 왕인이 이 나루터를 처음으로 난파진(難波津, 나니와쓰)이라고 명명했다.

이곳 난바가 오늘처럼 번창한 것은 이 지역이 고대부터 백제인들의 오사카 중심지인 데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이곳에 오사카 최초의 철도역으로 난바역이 1885년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곳에는 현재 JR 난바역을 필두로 하여 난카이 난바역, 긴테쓰 난바역, 미도스지선 난바역, 센니치마에 난바역, 욧쓰바시선 난바역 등 여섯 노선의 공공 및 사설 철도, 지하철 노선 등이 집중해 있을 만큼 오사카 번화가 중심 철도 요지이다.

고대의 오사카 땅 난바가 백제인 중심지로 발전한 단계의 핵심적 인물은 백제왕족인 백제왕씨(百濟王氏) 가문이라고 일찍이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가 논술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자면 우선 셋쓰국(고대 오사카 지방, 필자 주) 구다라군의 설치가 646년에 처음 나타난 것 같다고 했다. 구다라군의 설치는 지금부터 1300년 전의 일이다.
◇초대 난바역 경관.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의 연구론(1971) 몇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46년 개설된 백제군에는 동부향(東部鄕)과 남부향, 서부향의 3향으로 지역이 구분되었다. 660년 백제가 망한 다음인 664년 3월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왕족 선광왕(善光王) 등에게 난바에 살도록 거처를 정했다’고 돼 있어서, 난바야말로 백제군의 발상지로 보고 싶다. 선광왕은 백제국이 망한 뒤에 일본으로 온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의 친형 풍장(豊璋)과 함께 선광은 이미 631년부터 일본 왕실에 와서 살았다. 631년부터 664년까지 33년간 어느 곳에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그 기간에 국군제도(國郡制度)가 646년에 생겼기 때문에 백제왕족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군의 설치도 646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난바 지역에 백제왕족이 살고 있어서 그곳이 7세기 중엽에 백제군이 되었다고 본다는 것. 그러나 난바 지역은 이미 그보다 300년 전에 백제인 정복자들이 지배한 고장이라는 게 저명 사학자들의 연구이다. 후지자와 가즈오(藤澤一夫) 교수는 백제군의 동부향 등 3향의 설치에 관해 고대 중국의 역사서 등을 인용하며 다음처럼 지적했다.

“모름지기 ‘괄지지’(括地志) 등에는 백제국성(百濟國城)의 5방(五方) 또는 5부(五部), 국도(國都)의 5부라고 하는 행정구획에 준하는 것이다. 국도의 5부는 동서남북중(中)이라는 5방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부(上部)는 동쪽, 하부는 서쪽, 전부(前部)는 남쪽, 후부는 북쪽이 해당된다고 본다. 그리고 각지에 거주하는 씨족들은 자신의 관직과 씨명 위쪽에 그 부명을 얹어서 호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것은 당시 일본서기의 조선 관계 기사에 나오는 조선인들의 인명을 참조하면 자명하다. 그런 관점에서 백제왕족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계의 여러 씨족이 무리지어 살면서, 뒷날 백제군이 된 토지에다 그들이 고국의 5방 5부를 상기했다. 이를 재현하려는 심정에서 동부, 서부, 남부라고 하는 3향을 설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백제군의 대령(최고 관직)에 임명돼 그런 지도적인 입장에 있던 사람은 백제왕족들이었다고 본다.”

노중국(盧重國) 교수는 백제가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수도를 남부여로 고쳤을 때, “백제는 22부의 중앙 관서가 확대 정비되고 수도의 5부, 지방의 5방제가 갖추어져 국가 체제가 강화됐다”(‘사비시대, 백제지배 체제의 변천’ 1981)고 논했던 것도 참작된다.

백제가 고대 일본 오사카와 아스카 지역에서 국력을 과시한 자취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 고대사 연구가 우다 노부오(宇田伸夫, 1952∼)씨가 2002년에 쓴 역사 저술 ‘구다라가엔’(百濟花苑)을 보면 남편 조메이왕이 건축한 구다라궁(百濟宮, 백제궁) 터전에는 부여궁전(夫餘宮殿)이 있었다.

이 부여궁전에서 살던 고교쿠(皇極, 642∼645 재위) 여왕 당시의 일이다.

하시히토(間人) 공주와 히이라기 궁녀의 대화에서 공주가 정원의 붉고 아름다운 ‘잇꽃’을 가리키며, “이 꽃은 어디서 이곳 아스카(백제인 왕실 터전 나라 땅, 필자 주)에 온 것이지?”라고 묻자 궁녀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물론 구다라에서 전해온 것이지요.”

“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에서 온 것이구나”라는 공주의 감탄이 나온다. 즉 ‘백제 것만이 최고’라는 비유의 일본 옛말에 이른바 ‘구다라나이’(百濟無い)라는 유행어가 널리 전해졌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부터 ‘구다라나이’를 ‘쓸모없는 것’으로 나쁘게 해석하려는 사람도 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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