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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74>오사카 다나베 지역 백제인 구마다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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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8-20 02:19:13 수정 : 2008-08-20 0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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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의 七名家' 백제 조상에 머리를 조아리다
◇천년 수령의 녹나무.
일본 오사카시내 백제인 옛 터전으로 이름난 히라노(平野) 지역에는 백제인들이 세운 고대의 사당인 구마다신사(杭全神社, 오사카시 히라노구 히라노미야초 2-1-67)가 유명하다. 이곳에는 일본 철도의 ‘구다라역’(百濟驛, 백제역) 역시 우리가 주목하기에 족하다. 이 지역은 고대에 백제인 고관들의 터전으로서 이름난 ‘구다라고’(百濟鄕, 백제향)로서 지금도 널리 알려져 온다. 그러기에 백제역뿐 아니라 오사카 두 번째의 백제교인 ‘구다라하시’(百濟橋, 백제교)가 이곳에서도 역시 제 이름을 버젓이 갖고 있다. 필자는 한여름 삼복 뜨거운 7월의 햇볕 속에서도 더운 것을 잊고 고대 백제인 터전의 숨결에 아늑히 젖는다.

저명한 무라다 다카시(村田隆志) 향토사학자는 이 고장 ‘구다라고’(백제향)를 오늘에는 ‘히라노고’(平野鄕)로서 명칭이 바뀐 것 등을 지적하면서, 이 고장이 고대 백제 왕족과 그들 집단의 유서 깊은 터전임을 밝혔다.

“히라노고 지역은 오사카시의 히라노구와 히가시스미요시구에 걸치는 넓은 고장으로서 히라노강의 자연제방 위쪽을 차지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구라쓰구리(鞍作)의 고장이고, 서쪽과 북서부는 백제인들의 주거지로 알려진 지역이다. 또 이 고장 사카노우에씨(坂上氏)의 조상도 백제인이라는 점 등 히라노 주변의 개발은 이들 선진문화를 가진 도래인 씨족들의 우수한 기술에 의해 크게 이루어졌다.”(‘平野鄕小史’ 2005)

“구라쓰구리라는 가문은 6세기부터 나라 땅 아스카의 왕실에서 불상과 말안장을 만들기 시작한 도래인 기술책임자 벼슬아치(鞍部村主)였던 시바노 다치토(司馬達等·사마달등)와 그의 아들 구라쓰구리노 다수나(鞍作多須奈), 손자인 구라쓰구리노 도리(鞍作鳥)로 이어졌다. 이들은 조선 도래인이라는 설이다.”(三省版 ‘인명사전’ 1978).

구라쓰구리노 도리는 7세기 초에 아스카 왜왕실의 조불사로서 백제 여인 스이코여왕(592∼628 재위)의 총애를 받으며 “서기 609년 아스카절(飛鳥寺)의 구리 쇠 불상인 ‘장육불상’을 만들었으며, 서기 623년에는 나라 땅 이카루가에 있는 호류지(법륭사)의 ‘금동석가삼존상’을 만들어 찬양받은 조불사였다. 이에 나라에서 큰 녹(논 20정보)을 받았다.”(‘일본서기’)

이들 백제인 구라쓰구리 가문의 후손들이 집단적으로 살게 된 곳이 지금의 오사카 구다라노 지역의 가미역 일대이다. 그 때문에 구라쓰구리 가문 터전의 현재 지명도 그 가문의 구라쓰구리를 따서 가미노 구라쓰구리(加美鞍作) 지역으로 부르는 명소로서 오랜 역사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이 고장 가미노 구라쓰구리에는 그 가문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의 성씨에도 상전이라는 뜻의 위 상(上)자인 ‘가미’가 붙어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즉 이곳 가미노 구라쓰구리 터전 후손들의 성씨를 보면 가미노 오사(上曰佐)를 비롯하여 가미노 스구리(上村主), 가미노 마사루(上勝) 등이 있다.
◇구다라역(백제역).

물론 여기서 ‘가미’는 윗사람 집안을 가리키며, 이 고장 지역 명칭 가미(加美) 역시 한국 고대의 한자의 똑같은 음을 가진 한자어로서 함께 썼던 이두식(만요가나)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가미노 구라쓰구리 가문의 지역 덕분에 가미역은 상전의 역이라는 뜻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큰 도시로 바뀐 “이 고장 히라노(平野)는 본래 구다라노(百濟野, 백제들)이라는 큰 벌이었다.”(松井宏員 ‘마이니치신문’ 2007.7.6).

구다라노 들녘을 동남쪽으로부터 서북쪽을 향해 흐르던 강물도 구다라강(百濟川)이었으나 지금은 히라노강 또는 히라노 운하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만 두 곳의 백제교가 옛날 지명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구다라역의 벽에 걸린 표창장.

“구다라강의 강 이름도 1970년대 초까지는 있었으나 어느 사이엔가 그 명칭이 슬며시 사라졌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말이다. 저명한 사학자 이마이 게이치(今井啓一) 교수도 “최근까지 구다라강이라고 불렀다”(‘歸化人と社寺’ 1974)고 설명했었다. 그러므로 백제강이라는 행정 지명이 자취를 감춘 것은 1970년대 중엽부터가 아닌가 한다. 구다라강 하면 고대 일본에 구다라노 가와나리(百濟川成)라는 백제인 대화백이 있었고, 그에 관한 일화가 전인 1915년 당시에 일본 정부(문부성) 교과서에 한 과목으로 나왔다가 3·1운동 이후 빠져버렸다.

현재 오사카의 JR철도(大和路線) 노선에는 도부시조마에역(동부시장전역)이 있다. 고대의 구다라군 지역의 일반 철도역이다. 이 역과 대각선으로 불과 100m 정도를 사이 두고 이웃하고 있는 것이 역시 똑같은 JR철도 회사의 ‘구다라역’이다. 이 구다라역은 일반 철도가 아닌 화물 전문 철로의 백제역이다. 이 화물역 구다라역의 니시모토 마사유키(西本正行) 조역은 “이곳은 최초의 JR철도의 구다라역 터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의 일반 철도 노선은 없애고 그 대신 지금 같은 화물역 철도가 1963년에 다시 생기면서 역시 역의 이름은 예전처럼 구다라역이 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구다라역 사무실.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도 예전의 일반 철도의 백제역이 없어진 대신 그 자리에는 철도 화물역으로서의 백제역이 다시 생겨났음을 다음처럼 논술했다.

“고대의 구다라군 지역에는 1891년에 오사카시의 새로운 정촌제(町村制)가 실시되면서 미나미구다라손(남백제촌)과 기다구라손(북백제촌)이 생겼다. 오사카의 칸사이본선 철도 노선에도 덴노 지역과 히라노역 사이에는 ‘구다라역’이 생겼다. 그 후에 일반 철도역은 없어지고 그 대신 그 자리에 화물역이 생겼다. 그 이전부터 그 일대에는 시전(市電, 노면 전차)의 ‘구다라’(백제) 정류소가 있었고, 강의 명칭에도 히라노강 하류 쪽에는 구다라강(백제강)이며 고마강(巨麻川, 지금은 駒川이라는 문자를 쓰고 있다. 두 명칭 모두 ‘고구려강’이라는 뜻임. 필자주)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일반 철도역으로서의 백제역이 없어진 대신 그 자리에 백제역이라는 화물역이 다시 생겼다는 것이다.

백제화물역 동남쪽의 히라노역에 이웃한 곳이 오사카의 명소 구마다신사(오사카시 히라노구 히라노미야초 2-1-67)이다. 천년이라는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녹나무(약 30m 높이)가 웅장하게 서 있는 사당 어귀를 지나면 배전이 나온다. 그 뒤로 제1본전부터 제3본전의 사당들이 처마를 잇대며 줄을 선다. 이 사당 터전을 처음으로 세운 것은 백제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의 손자 사카노우에노 다아도였다.
◇철망에 가려진 百濟橋(백제교) 글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백제인 어머니 화신립(和新笠, 생년 미상∼789,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직계 후손. ‘속일본기’ 서기 797년 왕실 편찬 역사서) 황태후의 몸에서 태어난 간무왕(781∼806 재위)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천하를 주름잡던 조정의 최고위직 정이대장군이었다. 사카노우에노 다아도는 아버지 사카노우에노 히로노마로에게서 물려받은 구마다의 장원 터전의 저택 구마다장에 서기 862년에 할아버지 다무라마로의 신주를 모시고 다무라당(田村堂)이라는 사당을 세웠다.

이곳 구다라군(백제군)의 구마다신사는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사카노우에 가문은 후대로 이어가면서 백제인들의 일곱 가문으로, 즉 구로세(黑瀨), 이노우에(井上), 나리야스(成安), 스에요시(末吉) 가문 등 모두 칠명가(七名家)가 생겨났다. 해마다 5월23일에는 이들 칠명가 후손 가문의 대표들이 모여 다무라당에서 성대한 제사인 다무라마쓰리를 거행한다. 이 터전이야말로 이 고장뿐 아니라 오사카의 주목받는 고대 백제인의 본향이기에 수많은 참배자들이 도처에서 찾아든다. 무라다 다카시 향토사가는 “해마다 5월 23일에는 일곱 명가(名家) 집안분들이 와서 ‘다무라마쓰리’ 제사를 지내며, 제사 뒤에는 참배자들에게 ‘겐비시’라는 밀가루로 양념해 화살촉 모양으로 구워낸 과자를 나눠준다. 이것은 사카노우에 히로마로 장군의 부하 장병에게 군량 식품으로 이 고장 향민들이 바쳤던 흔적으로 알려지고 있다.”(앞책)

구마다신사의 후지에 쇼킨(藤江正謹) 궁사는 “이 고장 히라노 사람들은 이 신사를 처음 세웠던 사카노우에 히로마로의 대대의 자손들을 가리켜 ‘히라노도노’(平野殿, 히라노 원님)라고 찬양해 왔다”고 말했다. 어쩌면 ‘히라노 원님’이 아닌 ‘구다라 원님’으로 존칭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사당 구마다신사를 세웠던 사카노우에 히로마로의 묘지(平野市町)와 다무라공원도 인근에 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백제인으로서 일본 열도의 동북지방에서 나라 땅으로 쳐내려오던 아이누족 군사들을 여러 번 크게 물리쳐 간무왕은 혈족인 다무라마로를 몹시 아꼈다. 왕정을 무사히 치르며 헤이안시대(平安, 784∼1192) 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고마다신사 인근에는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를 수호한다는 수호불(守護佛)인 십일면관음상을 본존불로 모신 조호지 사찰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고마다신사의 다무라마로 사당인 다무라당은 본래 조호지 경내에 모셨던 사당을 옮겨간 것이라고 한다. 조호지를 세운 사람은 여승 지신대사(慈心大師)로 추앙받는 다무라마로의 처 사카노우에노 하루코(春子)가 세운 절이다. 조호지 인근 다무라공원에는 사카노우에노 하루코의 묘지와 사카노우에 가문 저택 터전도 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묘지는 멀리 북쪽 헤이안시대의 왕도 교토(야마시니구 다무라공원)에 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오진왕(4∼5C) 때 백제에서 건너온 아지노오미(阿知使主)의 후손(‘續群書類從’)으로 고대 일본 역사상 백제인 명장이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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