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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70>오사카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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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7-08 16:29:41 수정 : 2008-07-08 16: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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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국인 터전위에 학교 건립, 조상 얼 기려 '남백제'라 지어
◇고학년 재학생에게 백제 역사를 교육하는 미나미구다라초등학교의 정문.
오사카(大阪)는 항구 도시이자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오사카 시내에는 1874년에 개교한 ‘미나미구다라소학교(大阪市立南百濟小學校, 東住吉區湯里1-15-40)가 있다. 우리말로는 ‘남백제초등학교’이다. 필자는 6월 11일 ‘백제’라는 이름이 사용된 이 학교를 찾아갔다. 니시무라 치에코(西村千惠子) 교장이 기쁘게 맞았다. “우리 학교 이름에 ‘구다라’(백제)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쁜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 일본은 한류 바람이 불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일본과 백제 역사 문화를 자세하게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학교의 명칭에 ‘남백제’가 정식으로 채용된 것은 개교 20년이 되던 1894년부터였습니다. 우리 학교는 백제와 연고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한일 친선에 이바지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마치고 교장은 최근 학교에서 만든 백제와의 직접 연관되는 내용만을 편집한 학교 안내 책자(‘南百濟小學校と百濟とのつながりについて’ 2008년 6월 1일 제작)를 내주었다. 책자의 목차에 ‘한류(韓流) 붐’을 비롯하여 ‘백제(百濟) 붐’이라는 제목 밑에 소제목들이 달려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관광 투어’ ‘자매 도시 제휴 조사’ ‘홈페이지’ 등으로 이어진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고대 백제 지역에서 일본의 남백제 지역(오사카)으로 많은 백제인이 넘어왔다. 이들은 철을 전래하고, 청동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도기 그릇과 베틀, 토목 기술, 한자, 불교, 유교 등도 널리 알렸다. 660년에 백제가 망했을 때는 백제왕족인 선광(善光) 일족이 이 고장으로 건너왔다. 선광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거주 지역을 더욱 크게 확대했다.

백제왕족인 선광을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사로 모시고 있는 사당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히라카타(枚方)에 큰 터를 잡고 있다. 그 사당은 이름이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다. 이 신사 옆의 터는 고대 ‘백제사’라는 사찰 터전이며, 2005년부터 ‘백제사유적 발굴 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나미구다라초등학교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구다라대교.

니시무라 치에코 교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우리 고장을 방문하며, 학교를 단체로 찾기도 합니다. 미리 방문 날짜를 알려주면 좀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 고장은 본래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건너와서 살았지요. 646년에는 넓은 이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도 ‘구다라 고우리’(百濟郡, 백제군)가 됐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학교도 ‘남백제초등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백제군인 구다라 고우리의 ‘고우리’라는 말은 한국어의 ‘고을’에서 생겼다는 게 일본 학자들의 통설이다. 이곳 ‘유사토’(湯里)는 고대의 백제인 문화가 번창했던 오사카 지역의 하나였다. 행정 구역 상의 옛 지명은 ‘미나미 구다라무라’(남백제촌)에 해당한다. ‘무라’라는 일본어도 한국어의 ‘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전에는 백제강으로 불렸던 히라노강.

교토부립대학 고대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도 설명을 보탰다.

“오사카 지방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매우 많이 살았지요. 그래서 646년에 이 고장에 백제군이라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고요. 백제군이 생긴 이후로 오사카 지방 등에 급격하게 많은 백제인이 찾아든 때는 백제가 멸망한 660년부터입니다. 백제군 설치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 1965)에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와 함께 6월 13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백제 문화와 일본 아스카’를 주제로 강연한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백제인들의 일본 도래는 일본 문화와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며 “백제인과 백제 문화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오지 않았다면 일본 고대 문화는 적어도 100년 이상 뒤졌을 것이 틀림없다”고 역설했다. 이날 일본인 청중은 350명이 넘었다.

◇닌코쿠왕의 사랑을 받았던 백제인 고관 주군의 묘인 주군총의 비석.
‘자주 창조 협동 책임’이라는 교훈을 가진 남백제초등학교에는 학생 485명이 교직원 37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학생은 대부분 근처 주택가에서 통학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동 중에 한국 국적의 어린이는 5명입니다. 의무 교육이어서 수업료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공작물의 재료 대금 같은 것은 학생 부담입니다.”

교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 건물과 우리나라처럼 초등 학생의 숫자가 줄고 있다. 남백제초등학교의 전교생은 1950년에 2400명이었을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학생이 많이 줄었다. 취학 아동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때문이라고 한다.

니시무라 치에코 교장이 더 자세한 설명을 한다.

“우리 학교에서는 고학년인 5학년과 6학년 학생들에게는 이 고장 ‘남백제’에 관한 역사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1학년 학생부터 이해하기 쉽게 백제 역사와 문화도 가르칠 예정입니다.”

시설도 훌륭하다. 학교 본건물과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수영장과 운동장, 체육관이 있다. 3층 본관 앞에도 중형 운동장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간이 여유 있어 보였다. 학교 후문 안쪽에는 소형 소방차와 구급차도 대기하고 있어 화재 등의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교장과 교무주임(成瀨守一)의 안내로 학교에서 약 300m 거리에 자리한 사케노키미(酒君)의 묘지를 찾았다. 이곳은 고대 백제인으로서 왜왕실의 고관 자리에 있었던 이의 무덤이다. ‘사케노키미총(酒君塚, 이하 주군총)공원’이라는 명칭으로 꾸며진 이곳 중심부에 ‘주군총’이라고 하는 한자어가 보였다. 음각된 글자가 보이는 약 1m 높이의 비석이 있었다.

나루세 모라카즈 교무주임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남백제’ 지역을 표시한 고대 지도.
“이 주군총은 닌토쿠 천황(仁德, 5C경)의 총애를 받았던 백제인 고관 주군의 묘지입니다. 사냥을 좋아했던 닌토쿠 천황은 주군에게 사냥에 쓸 매를 길들이는 왕실 관할의 관청까지 설치해 주었지요. 닌토쿠 천황은 주군을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주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 백제인 터전에다 이런 훌륭한 묘역을 만들어 장례를 잘 모셔주었다고 합니다.”

닌토쿠왕은 왕인(王仁) 박사 밑에서 ‘천자문’의 한자어며 ‘논어’를 배웠다는 게 일본 역사에 실려 있다. 왜왕실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왕인 박사는 닌토쿠왕의 부친인 오진(應神)왕 당시 백제에서 ‘천자문’ 등을 전래했다. 왕인 박사에게서 글을 배운 닌토쿠왕이 등극하면서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백제인 왕인 박사가 일본 최초의 시가(和歌, ‘難波津歌’)를 지었고, 닌토쿠왕은 왕인의 제자였던 제4왕자였다.

물론 5세기 무렵 오사카 일대의 지배자였던 닌토쿠왕은 백제 왕족이다. 그 내용(‘日本國家の起源’ 1960)은 도쿄대학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를 비롯해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1918∼2000) 교수의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천황은 백제국 왕가로부터 일본 열도로 건너와 정복 왕조를 이루었다”(‘日本古代國家の形成’·1978)는 연구로 유명하다. 닌토쿠왕은 오진왕의 네 번째 왕자였다. 저명한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의 저서 ‘백제에서 건너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은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시와타리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羽曳野)시에 있는 오진왕의 왕릉에 대해 “오진릉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의 곤지(昆支)왕자이다”며 “그는 5세기 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단정했다. 곤지 왕자는 개로왕의 둘째 왕자이다(‘삼국사기’).

필자와 함께 학교에서 약 1km 떨어진 ‘백제대교’(百濟大橋)라는 이름의 다리를 찾은 니시무라 교장이 이곳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지금은 이 백제대교 터전이 주택가 시가지로 개발돼 있으나, 예전에는 이 고장 일대는 큰 벌판이었지요. 백제강(百濟川)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변의 큰 물이 흘렀던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백제강이라는 강 이름은 뒷날 ‘히라노강’(平野川)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이 고장은 ‘구다라노’(百濟野)라고 부르던 ‘백제벌판’이었던 곳이 개척돼 오사카라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됐다. 강물도 홍수에 대비해 큰 줄기에서 여러 갈래의 도랑으로 작게 나뉘었다. 바닥은 깊게 파서 사방 공사를 하게 됐다. 이곳 남백제소학교도 현재는 큰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으나 본래는 ‘백제야’라는 평야 지역이었다. 오사카 중심 지역의 ‘구다라고우리’라는 ‘백제군’은 1889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인 1889년 4월 1일부터 오사카 지역에는 일제의 새로운 ‘정촌제’(町村制) 행정 제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백제’ 지명 등 고대 백제인의 발자취는 곳곳에 현존하고 있다. 그 옛날 ‘구다라스(百濟洲·백제주)’였다는 오사카 중심지는 참으로 한국인들에게 관심 있는 백제 옛 터전인 것 같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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