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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69>교토 오중탑과 고구려 사찰터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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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6-11 10:28:53 수정 : 2008-06-11 10: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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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세기 고구려서 온 사신들 사찰 지어 조상 기려
◇교토 고구려 오중탑.
지금의 일본 교토(京都)의 상징 건조물은 ‘기온’거리 언덕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 본래 명칭은 기온사·祇園社) 옆에 우뚝 솟은 오중탑(五重塔)이다. 백제인 어머니 화신립(和新笠, 사망) 황태후의 몸에서 태어난 제50대 간무왕(桓武, 781∼806 재위)이 796년에 일본 고대의 새로운 왕도로 헤이안경(平安京)을 만들었던 곳이 지금의 교토 지역이다. 교토는 고대 고구려의 중요한 흔적들이 지나간 고대 한국인들의 발자취를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게 교토시 동쪽 히가시야마(東山)에 있는 야사카(八坂) 언덕의 六세기 오중탑(목조탑)이다. 본래의 정확한 명칭은 호칸지(法觀寺, 이하 ‘법관사’) 오중탑이다. 이 법관사를 창건한 것은 고구려인들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법관사는 고구려에서 건너 온 고구려인 귀족들이 자리 잡고 만들어 그들의 조상을 받드는 이른바 씨사(氏寺)였다. 절 이름은 야사카데라(八坂寺)라고도 했다. 지금의 야사카신사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에 일제가 명명한 신사의 이름이다. 그 이전까지는 기온사였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좀 복잡하겠으나 고대 일본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불교와 신도(神道)를 받들었다. 설명하자면 ‘신령님’과 ‘부처님’을 함께 존중하며 신앙했었다. 이것을 학문적으로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일컬었다.

우리나라 불교 사찰에서도 산신령을 모신 ‘산신당’(山神堂) 등을 경내에 두는 곳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고구려인들이 신도와 함께 불교를 신봉했던 이 터전의 발자취는 일본 고대 역사 기사에 상세하다. 고구려인들이 기온사(야사카신사)와 법관사(야사카데라)를 함께 섬기게 된 과정은 이렇다.
◇고구려절터 시비 앞에서의 필자.

7세기 중엽에 고구려 28대 보장왕(642∼668 재위)이 보낸 사신들이 일본 왕실로 건너왔다. ‘일본서기’의 역사 기사를 보면, “고구려에서 서기 656년 8월 8일에 대사 달사(大使達沙)와 부사 이리지(伊利之) 등 모두 81명이 건너왔다”고 한다.

이들은 보장왕이 보낸 대사절단이었는데 이 당시의 일본왕은 백제 계열인 여왕인 제37대 사이메이왕(齋明, 655∼661 재위)이었다. 사이메이왕은 이 당시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메이왕의 죽은 남편은 나라 지역에 ‘백제궁’을 짓고 살았던 유명한 백제계의 조메이왕(敍明, 629∼641 재위)이었다. 사이메이왕은 660년, 백제가 망하자 곧 백제 구원군 2만7000명을 편성한 뒤에 서거한 여왕이기도 하다. 더구나 주목되는 것은 야사카신사의 역사 기록인 ‘야사카신사 유서략기’(八坂神社由緖略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교토의 가미코마 지역에 있는 고구려사 절터.

“야사카신사는 ‘기온사’(祇園社)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야사카신사의 창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사이메이천황 2년에 고구려에서 일본 황실로 온 부사(副使)인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 이리시노오미)가 신라국 우두산의 신(神)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神主)를 이곳 야사카 터전으로 옮겨 모셔 와서 제사드렸다”고 한다. 다른 고대 문서에도 불교 사찰이었던 법관사터에 “서기 876년, 신라계의 원여(圓如) 스님이 건너와서 이 터전에다 이번에는 기온정사(祇園精舍)를 세웠다”(‘八坂御鎭座大神之記’)고 한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신라신의 신주를 모시고 건너온 데 이어 신라 승려도 이곳에 찾아와 불교 신앙도 함께 받들게 됐던 것이다.

고대 일본에는 서기 538년 백제 성왕(523∼554) 재위 시절 불교가 일본 아스카로 처음 건너 갔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불교가 전파됐다. 사찰과 고대의 신도 사당인 신사가 매우 사이 좋게 한 터전에 자리하는 등 ‘신불습합’이 이뤄졌다. 하늘신과 부처 동일체(同一體)의 종교적인 합병이 이루어진 셈이다. 12년 전 필자가 일본에서 시청한 일본 방송에서도 “야사카신사를 가리켜 ‘고구려대사’(高麗大社, 고마다이샤)로도 부른다”(NHK TV 보도, 1996.5.20 PM 6:20)고 했다. 이로 미루어 야사카신사며 법관사는 고구려인들이 창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사카신사는 이리지의 장남 마테(眞手)의 자손들이 대대로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 사이메이왕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 이리지에게 내려준 사성·賜姓)를 세습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八坂神社’, 1972)고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년 편찬)에도 “야사카노 미야쓰코는 고구려인 이리지이다”라는 게 밝혀져 있다. 이리지(伊利之)는 일본 옛 문헌에 고구려 사신 이리좌(伊利佐, 이리사)로도 간혹 표기돼 있으나 이리지와 틀림없는 동일 인물이다.

그런데 매우 궁금한 것은 당초부터 이 법관사 어귀에 우뚝 서있던 유명한 ‘고구려문’(高麗門, 고마몬/일본 역사에서는 ‘高句麗’를 한자어 ‘高麗’로 표기하고 있음)이 어디론지 자취를 감춘 일이다. 고구려문이 사라진 시기는 일본 군국주의 치하라는 게 통설이다. 왜냐하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불교 말살정책’을 펼쳐, 일본 각지의 사찰들을 불지르고 불상을 훼손했기 때문이다(尾藤正英外 ‘日本史’ 1991). 필자가 추찰하는 것은 지금의 나라현 남쪽 끝 요시노산(吉野山) 어귀에 있는 ‘고구려문’은 아마도 일제가 교토땅 법관사 앞에 서 있던 문을 나라땅 남쪽 멀리 떨어진 외딴 요시노산 산속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 학자들도 그 발자취는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 고구려인의 야사카신사 사당.                      ◇ 현재에도 쓰는 고구려 피리들.

교토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또 다른 고구려 유적은 교토시 남쪽의 야마시로초 오코마 들판에 있는 고구려절터(高麗寺祉)이다. 교토의 일본 국철 JR철도 교토선 가미고마역에서 동쪽으로 불과 300m 남짓한 곳에는 고구려절터 사적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1943년 4월 세움)이 있다.

사적 설명판에 “고구려절은 서기 7세기 초인 아스카 시대에 창건된 일본에서 가장 오랜 가람의 하나이며, 한반도에서 도래한 고구려 씨족들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적비가 없으면 이 터전에 그 옛날의 고구려인들의 큰 가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쓸쓸한 고구려절터지만 교토 야마시로초는 이 절터를 크게 복원할 계획이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인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지난 날 이 고장은 교토땅의 오코마향으로 고구려인 씨족들이 번창했던 헤이안경의 이름난 고장이었습니다. 이 지역 야마시로초의 명칭은 본래 고마손(高麗村)과 가미고마초, 다나쿠라손(棚倉村) 등 이 일대 고구려인들의 여러 고장들이 모두 크게 하나로 통폐합된 지명이기도 합니다. 이 사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34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도로 확장 공사 도중 땅 속에서 옛날 기와와 도자기 등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답니다.” 
◇ 요시노산에 있는 고구려문.

이 고장 교육위원회에서 간행한 책자(‘사적 고구려사적’)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12.8㎡ 와적(瓦積) 기단이 있고, 중앙에 심초를 갖추고 있다. 심초는 사리공(舍利孔)을 갖춘 전국 유일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당 자취와 탑자리에서 서쪽 8m 지점에 남북 13.3m, 동서 17m의 와적 기단을 갖는 금당과 강당 자취가 있다.”

이곳 고구려절터에서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조그마한 시비(詩碑)이다. 지금부터 36년 전 이 유적에 찾아와서 사방 40㎝ 남짓한 돌에다 김모(이름이 흐림)씨가 지은 일본 와카(和歌)로 쓴 시비였다. 번역하면 “나그네여 생각해 보아요. 옛날의 길을 열어낸 고구려의 발자취를”(1972.3 吉日)이다. 이 구절은 필자의 가슴을 잔잔하게 흔들어 주었다.

일본 역사책에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구려’(高句麗)를 주로 한자어 두 글자인 고려(高麗, こま, 고마)라고 써서 표현해 온다. 즉 고구려(高句麗)의 3글자에서 ‘구(句)’자(字)를 빼고 高麗(고마)로 써왔던 것이다.

그밖에도 또한 고구려를 가리켜 한자어의 박(こま, 고마)과 대박(大こま, 큰고구려)이라고도 써왔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유서깊은 신사(사당) 어귀에는 어김없이 문어귀 양쪽에 마귀를 쫓아준다고 하는 수호신 동물 한쌍의 ‘고구려 개’ 조각상이 있다. 이 수호신 고구려 개 이름 역시 ‘고마이누’로 불렸다.

일본 고대 건축에 사용했던 훌륭한 ‘고구려자’는 ‘고마샤쿠(高麗尺)로 표기해왔다. 또한 일본에서 아이들의 장난감인 ‘팽이’를 ‘고마’(こま, 한자로는 獨樂)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에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놀이 기구이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꼭 알아둘 것은 한국 역사의 ‘삼국시대’를 뒤이은 우리나라의 ‘고려’(高麗, 918∼1392) 시대의 경우, 한자어는 두 글자가 똑같은 고려(高麗)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고려는 고구려와 구분하여 소리내서 읽는 음독(音讀)에서 ‘고라이’(高麗, こうらい)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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