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65>백제혼 서린 규슈 후나야마 고분

관련이슈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입력 : 2008-05-25 14:55:23 수정 : 2008-05-25 14:55:2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백제 왕권상징 유물 무더기 출토

日 고대문화 한반도 영향력 짐작

◇1873년 1월 발굴된 일본 규슈 후나야마 고분의 안내판과 전경

일본 열도 남쪽의 커다란 규슈섬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고대문화의 다채로운 발굴현장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고대 한국인들의 벼농사와 철기문화 등 선진국의 힘이 원시적 미개 상태였던 일본 선주민의 섬나라로 건너가 그들을 지배했던 뚜렷한 흔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곳이 전장 47m의 ‘전방후원분’인 ‘후나야마 고분’(船山古墳, 구마모토현 다마나시 기쿠스이초 에다·熊本縣玉名市菊水町江田 소재)이다. 이 고분의 뒤쪽은 우리나라 왕릉처럼 둥글며, 원분의 지름이 26m인 큰 무덤이다.

이 고분 속은 집 모양의 조립식 가형 석관이다. 내부는 2.2m 길이에 너비 1.1m이며 천장 높이가 1.45m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장품은 왕권을 상징하는 금동제 관모와 신발(沓), 한자어로 ‘대왕’(大王) 명문(은상감)이 새겨진 철제 큰칼인 ‘대도’(大刀)이다. 

여기서는 청동거울과 두 쌍의 금귀고리, 곡옥, 벽옥, 관구슬 등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신구, 갑옷 등 무구(武具)와 ‘삼환령’ 같은 마구(馬具)에 이르기까지 유물 92건(종류)가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발굴 직후 도쿄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현재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무덤이 처음 발견된 때는 1873년 1월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군국주의 일본 정부는 발굴 이후 유물 공개를 미루다가 1900년대 이후 발굴 내용을 차츰 알리기 시작했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
역대 일본 왕 무덤에서는 ‘왕관’이라는 것이 아직 나온 일이 없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일본 학자들은 일본 각지 고대 분묘에서 금동제 관모가 나오면 그 뿌리를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찾았다.

이 후나야마 고분의 금동제 관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사카시립대학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이 고분에서는 신라와 백제계의 금동관, 금동 신발, 금귀고리 등 풍부한 부장품이 동시에 출토됐다. 

이곳 후나야마의 수장(首長, 왕 등 지배자, 필자 주)은 신라, 백제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남조선에 종속했던 사람이 아닌가 한다”(‘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일본 고대사학자 김석형(金錫亨·1915∼1996) 교수는 무덤 속 피장자를 5세기에 기타큐슈를 거느리던 본국 백제왕의 신하인 백제인 후왕(侯王, 식민지 왕)으로 간주했다. 즉 “이 고분의 피장자는 백제인 후왕이다. 

매장될 당시에 관모로부터 귀고리, 반지, 신발, 무기, 토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물품으로 몸을 장식하고 조선 물건으로 둘러싸여 백제왕으로부터 전해 받은 은(銀)으로 상감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칼을 부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고분의 부장품은 신라와 가야의 것이 아닌 백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古代朝日關係史’ 1972)고 논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두식 한자어 75글자가 모두 은으로 상감하여 새겨진 손잡이가 없는 85cm 길이의 큰 칼이다. 김석형 교수는 이 칼에 대해서 “백제 개로왕이 만들어 왜 땅에다 거느리던 신하인 백제인 후왕에게 하사했다”(앞의 책)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 칼 앞머리에 등장하는 한자어 글자의 획 등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대왕(□□大王)의 이름을 백제 제21대 개로대왕(蓋鹵大王)으로 추찰했다. 

◇후나야마 고분의 내부 모습
일본 교토대학 사학과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 교수는 그 이름(□□大王)을 ‘미즈하대왕’(瑞齒大王)이라고 내세웠다. 

그러자 일부 국수적인 일본 학자들은 후쿠야마 교수 주장에 동조하였다. ‘개로’(蓋鹵)라는 글자와 ‘서치’(瑞齒)라는 글자 형태는 서로 엇비슷한 모양이다.

75자 중에서 식별할 수 있는 글자들로 전체적인 뜻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천하를 다스리는 □□대왕 시대에 대왕의 명령을 떠받드는 관청 사람, 기리(?利)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다. 

8월에 커다란 용해 가마(溶解釜)를 사용했다. 4척(尺)짜리 □칼(□刀)을 80번 담금질하여 60번 휘둘러 3재(三才, 우주의 만물)를 만들었다. 이 훌륭한 칼을 몸에 차는 자는 오래 살고 자손도 많을 것이며 그가 거느리는 곳(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리라. 

이 칼을 친히 만든 자의 이름은 이태어(伊太於)이며 글자를 쓴 것은 장안(張安)이다.” 일본 학자는 칼 제작자 이름 글자를 이태어(伊太於)가 아닌 이태가(伊太加)로 보았다. 앞의 나오키 고지로 교수는 “이태가(伊太加)는 일본 사람이고 장안(張安)은 조선사람이다”고도 했다.

1975년에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나라현 덴리시 소재)의 “백제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왕이 후왕인 일본의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다. 이 칼에 새겨진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린 하행문(下行文) 형식의 글투이다”(‘古代史の焦點’)라고 단정한 백제 칠지도의 다음 같은 명문도 자세하게 읽어보기로 한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즉 “(칼의 앞면 글자) 태화 4년(서기 369년) 5월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거듭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侯王)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칼의 뒷면 글자)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과 구수세자(필자 주: 뒷날의 근구수왕, 375∼383 재위)는 성스러운 말씀으로써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노라.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여주도록 하라.”

참고하자면 칠지도에 새겨진 한자어는 (앞면)“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以. 百兵 宜供供候王 □□□□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로 판독되고 있다. 

이와 같이 4세기 백제 왕실에서 만들어 일본땅의 백제인 ‘왜왕’에게 보내준 칠지도의 글투와 5세기 후나야마 고분 출도 큰칼의 글투는 그 문맥상 뜻이 유사성을 잘 보이고 있다.

규슈 중북부 지방에 있는 이 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제 관모는 높이 13.6㎝, 밑변 길이 15.1㎝이며 뒷부분에 뱀처럼 구부러진 줄기에 달린 둥근 반구형(半球形)의 장식 금구(金具)가 큰 특징이다. 더구나 이 금동제 관모는 1982년 2월 우리나라의 ‘입점리 백제 고분’(전북 익산시 웅포면)에서 출토된 금동제 백제 관모와 마찬가지로 반구형의 장식 금구까지 달려 있어 그 제작 형식이 백제 금동관모와 매우 유사해 주목된다.

또 뒷날인 2003년 공주 수촌리 고분(사적 460호)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도 역시 반구형의 장식 금구가 달리는 등 그 제작 형식이 서로 닮았다. 후나야마 고분 출토의 길이 29.7㎝의 금동 신발 역시 입점리 백제 고분 출토 금동 신발과 매우 흡사한 제작 형태를 보이고 있다.

◇후나야마 고분의 외부 모습

또 후나야마 고분의 청동거울도 공주 무령왕릉 출토 청동거울의 동물 형상의 부조와 구멍 뚫린 손잡이, 둥근 테두리 장식 부조 등 전체적인 생김새의 제작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무녕왕릉 발굴 이후 후나야마 고분이야말로 백제 왕가적인 유물들이 잔뜩 쏟아져 나온 가히 백제인 일본땅 규슈 지배자(왜왕)의 무덤이라 주장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일본 기타큐슈 지방에서 계속 출토되는 허다한 고분 등의 발굴물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기타큐슈의 옹관묘 유적 출토품으로는 청동 제품이 많다. 이 출토품들은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주로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北九州と南鮮’[日本の歷史] 1980)고 했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들의 고대 일본 지배 배경은 일본 기타큐슈 지방을 주축으로 진출하면서 벼농사를 비롯한 청동기며 철기 문화의 일본 전파가 그 바탕이 됐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

2007년 4월 필자 등과 함께 전남 영암에서 강연(‘국립영산강고고학박물관 건립 추진 학술토론회’)한 일본고고학회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회장(규슈대 명예 교수)은 “일본 야요이시대(BC3∼AD3)에 영산강 유역을 시발로 하는 벼농사법을 ‘요시노가리 유적’(吉野ケ里遺跡, 1989.1 확인) 등 일본 규슈땅으로 가져다 준 한국의 벼농사 문화는 그 이후 쌀농사가 일본에서 정착하게 했다. 마한시대의 영산강 유역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고인돌 무덤)와 철기와 와질(瓦質) 토기 등 문화는 일본 야요이시대 후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횡혈식 묘지 석실의 구조와 농기구, 토제품도 백제 것들이다”고 했다.

저명한 사학가 네즈 마사시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규슈 진출 배경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고유 일본인(固有日本人, 본래부터 일본에 살아온 선주민)은 석기와 토기를 사용해 채집과 사냥 및 고기잡이 활동을 했다. 어느 정도의 재배도 했는데, 그 사회조직은 계급이 없는 공산(共産)사회였다. 기원전 1세기쯤이 되자 한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인종(人種)과 문명이 들어왔다. 

즉 한국인이 벼농사와 철기 청동기 및 노예(奴隸)제도의 사회조직을 가지고 우선 기타큐슈에 들어왔다. 그 결과 일본에서 벼농사가 퍼지게 됐다. 종래의 공산사회는 노예와 그 소유자, 대토지 소유자와 경작 농민으로 구분되는 계급사회로 변했다. 그와 같은 과정은 전쟁이나 타협에 의해 진행됐다. 그리고 노예 소유자와 대토지 소유자가 농민과 노예를 직접 지배하는 전제국가로 변했다. 

기타큐슈의 고분(무덤)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에 가까운 고분인(古墳人)의 뼈가 나오고 있고, 그 자손이 현대 일본인이 됐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고분인인 조선인과 중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 또 6∼8세기의 아스카(飛鳥), 나라(奈良)시대에도 많은 조선인이며 중국인이 일본에 도래했으므로, 한층 더 그들에 가까운 것이 됐다”(ねずまさし ‘天皇家の歷史’[上] 1989)고 한국인들이 미개했던 고대 일본사회를 직접 지배한 것을 시인했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혜윤 '사랑스러운 볼하트'
  • 김혜윤 '사랑스러운 볼하트'
  • 채수빈 '매력적인 미소'
  • 조보아 '아름다운 미소'
  • 아이브 장원영 '빛나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