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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여행]<64>닌토쿠왕과 백제왕족 사케노키미의 터전 응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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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5-25 14:58:37 수정 : 2008-05-25 14: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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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그 웅대한 식민지 개척의 발자취 지난 2월 7일, 나라현의 ‘아스카촌 교육위원회’가 아스카에서 거대 무덤 ‘마유미간스즈카’를 발견했다. 발굴단은 “이 묘지 주인공은 백제 왕족 ‘야마토노아야(東漢)’ 가문의 수장급 인물로 보인다”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6세기에 만들어진 이 고분은 아스카촌(明日香村) 서부 구릉 지대에서 발견됐다. 길이 약 40m에 이르는 둥근 무덤이다. 1920년대와 1962년에도 조사됐지만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무덤은 지금까지 아스카 지역에서 발굴된 가장 큰 무덤이다. 

지난해 7월부터 묘역 약 200㎡를 조사해 공개한 고분 내부 석실(石室)은 전장이 19m가 넘는다. 폭이 큰 곳은 4.4m, 높이는 4.7m다. 백제계 스이코여왕(推古 592∼628년)보다 훨씬 이전에 백제 왕족이 먼저 이 고장에 건너와서 지배의 터전을 다진 것을 입증한다. 이처럼 오사카로부터 아스카에 이르는 지역에는 고대 백제인들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구다라스 터전인 오사카 중심지.

오사카와 아스카는 백제의 옛 터전이다. 역사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1909∼1992년)는 “일본 천황가의 조상은 남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왔다”(日本史謎と鍵, 平凡社, 1976년)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본과 조선은 같은 민족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다. 행인지 불행인지 쓰시마(對馬島) 해협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한반도에 전쟁(신라·백제·고구려 삼국 간의 전쟁, 필자 주)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독립해서 일본의 특성을 가진 나라로 변해 갔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마찬가지다.”(松本淸張 ‘東京新聞’ 1972년 4월1일) 지금부터 이미 1000년 전부터 오사카는 ‘백제국’을 뜻하는 ‘구다라스(百濟洲)’라는 지명이 일본 고대 ‘나니와쓰(難波津)’ 중심 지도에도 나타났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백제역’(화물역)과 ‘백제통’(百濟通·거리), ‘남백제소학교(南百濟小學校)’,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왕인묘(王仁墓)’, ‘왕인공원(王仁公園)’ 등이 산재한다.
◇오사카 전철의 중심 역의 하나인 난바역.

오늘날 오사카 중심지 번화가는 ‘난바(難波)’ 지역이다. 백제에서 온 왕인 박사는 이미 5세기에 이곳 나루터를 일컬어 나니와쓰로 이름지었다. 왕인은 고대의 나니와쓰(오사카) 개척의 위인이었다. 젊은 날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왕인은 왜 왕실 왕자에게 한자어와 시가를 가르쳤다. 그 왕자는 5세기 초에 등극한 청년 ‘닌토쿠(仁德)’ 왕이다. 왕인은 젊은 닌투쿠 왕자(大雀命·오사사기노미코토)를 왕위에 등극시켰다(古今集·고킨슈 905년 편찬).

닌토쿠 시절부터 비로소 나니와쓰에는 백제문화가 활짝 꽃피기 시작했다. 일본 최대 묘지는 이 고장의 닌토쿠 왕릉(전장 486m)이고, 두 번째로 큰 것은 닌토쿠 왕의 아버지 오진 왕릉이다.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 1926년∼)는 ‘백제에서 건너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년)의 저자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여러 권위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백제에서 건너온 ‘구다라 왕족’을 인정했다.
◇남백제촌 터전인 오사카 중심지의 사케노기미의 사당 다카아이신사.

와세다대학 역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裕) 교수가 “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다”(日本國家の 成立 1968년)라고 하는 것을 굳이 부정하려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백제 왕족들의 최초 일본 도래지는 규슈라고 했다.

오사카 중심 지역의 옛 행정구역 명들을 잠깐 살펴보면 과거의 발자취는 쉽게 이해된다. 오사카 행정학자로 이름난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의 ‘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 전 6권, 1922년)에는 이 고장 구다라스가 백제인 왕들의 지배 터전이었음이 실감 난다. 우선 명칭도 ‘구다라 고리(百濟郡)’였다. 구다라고리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돼 있었다. 남백제촌에는 응합촌(鷹合村·다카아이무라), 사자촌(砂子村·스나고무라), 중야촌(中野村·나카노무라)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다카아이무라의 경우는 닌토쿠왕 43년 9월에, 백제인 아비코가 특이한 매를 잡아서 사냥을 좋아하던 닌토쿠왕에게 갖다 바쳤다. 이때 닌토쿠왕은 왕실에다 몸소 매를 양육하는 왕실 관장 중요 기관으로서 다카가이베(鷹甘部)를 설치했다. 닌토쿠왕은 그가 조정에서 늘 아끼던 백제인 왕족 신하인 ‘사케노기미(酒君)’에게 매를 건네주며 잘 기르라고 했다. 이때 새로 생겨난 관청이 다카가이베다(일본서기). 
◇남백제촌 지역의 백제인 닌토쿠 왕의 총신 사케노기미 무덤.

이 다카가이베 자리의 옛날 지명은 남백제군의 다카아이무라다. 현재도 이곳의 지명은 예전과 똑같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大阪市 東住吉區) 다카아이초(鷹合町)다. 그 당시 닌토쿠왕의 고다카쓰노미야(高津宮)는 구다라스의 난바여서 이곳 주군의 다카가이베 관청과 가까웠다. 닌토쿠왕은 글이 뛰어나 시가에도 능했던 주군과 늘 사냥을 함께 다니며 즐겼다. 백제인 주군이 죽자 닌토쿠왕은 크게 슬퍼하며 이 고장 다카가이베 터전에서 장례를 지내주고, 그에게 매를 돌보는 신으로서 ‘응견신(鷹見神)’이라는 훌륭한 시호까지 내렸다.

오사카에는 고대의 ‘사케노키미즈카(酒君塚)’ 비석도 서 있다. 그런데 고대의 응견신을 제사지내던 다카아이신사 이름을 일제는 근거도 없이 현재처럼 ‘스사노오노미코토 신사’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더구나 이 사당(신사)의 신주 이름은 엉뚱하게도 본래의 응견신이 아닌 일본 개국신의 하나인 ‘스사노오노미코토’로 바뀌었다. 지금의 사당 현판에 써 있는 것을 보면 사당의 별칭으로 ‘별명 다카아이신사’라고 덧붙여 놓은 게 오히려 군색해 보인다. 
◇아스카의 거대 무덤 ‘마유미간스즈카’.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하여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의 큰 행정구역들이 속해 있었다. 또한 덴노지촌(天王寺村)은 본래 백제군에 속하는 큰 행정구역이었다. 현재의 오사카시 덴노지구(天王寺區) 지역이다. 그 옛날 백제군의 덴노지촌에 지금껏 자리 잡아 오고 있는 가람이 고대에 백제 건축가들이 건너와 창건했던 시텐노지(四天王寺)다.

해마다 11월에는 백제 불교가 건너왔다는 ‘사천왕사 왔소’라는 큰 축제 행사가 열린다. 구다라스 땅이 백제인의 지배의 터전이며, 바로 그 중심에 우뚝 선 가람이 시텐노지였다. 오진, 닌토쿠 왕 부자 시대 때 백제인들의 왜나라 중심지에 시텐노지가 건설된 것은, 6세기 말에 나이 어린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가 백제 불교의 번창을 위해 불교 반대 세력을 제거하던 전쟁(587년) 도중에 창건을 제의해서였다. 그 무렵 쇼토쿠태자는 백제인 여성 스이코 여왕의 생질로서, 여왕의 태자로 책봉됐다. 시텐노지가 서 있는 우에마치 대지(上町台地) 일대는 난바의 중심부 지역이다(直木孝次郞 ‘日本歷史’ 1970년).
◇오사카의 닌토쿠 왕릉.

이 난바 터전에서 부왕인 오진왕(4∼5세기 초)에 이어 405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백제인 닌토쿠왕이었다. 그 밖에도 이시카와 구다라노무라(石川百濟村)과 구다라오미(百濟大井) 지역이 구다라스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구다라 고리’의 각 행정구역 구다라 명칭들이 현재처럼 바뀐 것은 일제의 군국주의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부터다. 일제는 역사 과장 조작의 바탕으로써 일본의 건국 시기를 600년 올려 ‘기원 2600년 만세일계의 천황’설을 내세우고 신토주의 황국사상을 외쳤다. 급기야 1910년에는 한반도 침략과 함께 서슴없이 백제와 관계된 지명들을 없앴다. 백제인 신주(神主) 주군의 정체를 숨기고 다카아이신사라는 본래의 사당 이름마저 현재처럼 ‘스사노오노미코토 신사’라고 개칭한 것이 그 한 예이다.

4세기 후반 한국 남부와 근접된 규슈 섬을 완전히 정복한 백제인들의 제2 진출지는 다름 아닌 오사카 땅이었다. 백제인들은 기타큐슈로부터 대형 선박들을 띄워서 일본 열도의 본토 세도나이카이로 동진(東進)했던 것. 이와 같은 백제인들이 상륙한 곳이 지금의 오사카 항구 지역인 난바 나루터였다. 이 나루터 일대를 교두보로 해서 오사카는 백제인들의 새로운 식민지 구다라스가 되었다. 영국 브리튼의 제1 도시였던 욕(York) 사람들은 대서양의 험한 파도를 건너가서 미국의 항구 도시를 ‘새로운 욕’, 즉 ‘뉴욕(New York)’이라고 명명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백제인 왕족들은 한반도 멀리로부터 현해탄 건너 험난한 파도를 헤쳐 구다라스 땅으로 건너와서 건설한 새로운 나루터를 ‘나니와쓰’로 명명한 것도 영국인들의 뉴욕 진출보다 이미 천 년 전의 웅대한 식민지 개척의 큰 발자취였다. 더구나 그 나니와쓰 땅 중심지에 가장 큰 행정구역의 정식 명칭을 ‘구다라 고리’로 불러온 사실 또한 우리는 새롭게 평가할 일이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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