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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62>신라계 고승 쿠카이가 창설한 사찰 '공고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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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5-06 13:02:07 수정 : 2008-05-06 1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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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불교 진언종의 본찰인 고야산의 공고부지 입구와 본당인 부동당. 공고부지에는 국보 부동당과 ‘동자입상’ 등 150점에 달하는 중요문화재가 있다.
약 2년간의 짧은 당나라 유학(불교 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일본 불교 진언종의 개조(開祖)인 고호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774∼835). 그가 큰 뜻을 품고 43세 때인 817년 개창한 최초의 사찰은 험준한 고야산(高野山, 와카야마현 이도군 고야초) 깊은 산속의 공고부지(金剛峯寺)였다. 신라계 고승 구카이(연재 61회 참조)가 밀교 수행의 도량으로 세운 공고부지는 오늘날까지 일본 진언종의 성지이자 고승과 수도승들의 요람이다.

이 가람은 오사카 시내 ‘난카이(南海) 전철’의 ‘고야선’(高野線)으로 약 2시간 남짓 남행하여 깊은 협곡을 누비며 산속 종점에서 내려 다시 등산 케이블카 편으로 오르게 된다.

공고부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또한 본당인 국보 ‘부동당’과 ‘동자입상’, 수묵화인 ‘난파진해람’(벽문짝, 맹장지 그림) 등 30점을 헤아리는 국보와 100점에 이르는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등 일본 고대 불교문화의 요람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 공고부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경장’(經藏, 중요문화재)이라는 서고이다. 경장은 임진왜란(1592∼1597)이 실증되는 역사적인 터전으로 지금까지 411년이나 존재해 오고 있다. 깊은 산속 공고부지 울창한 숲 가운데 위치한 이 서고에는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 왜장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1560∼1600)가 행주산성 전투(1597)에서 참패한 이후 퇴각하면서 약탈한 ‘고려대장경’ 경판들이 숨겨 있다. 
◇공고부지 경내에 세워져 있는 탁발하는 고호대사 구카이 동상. 구카이는 고대 일본의 신라계 고승으로 817년 공고부지를 세웠다. (왼쪽)◇임진왜란 때 한반도로부터 약탈한 ‘고려판일체경’ 6285첩을 보관하고 있는 공고부지의 전각 ‘경장’이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 있다.

도쿄대학 건축사학 교수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는 1963년 안내 책자인 ‘국보·중요문화재 안내’에서 “공고부지 경내 동쪽 숲속 끝 오원(奧院)의 고호대사 묘(廟, 사당) 동남쪽에 서 있는 ‘경장’은 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웠으며, 이 안에 들어 있는 ‘고려판일체경’(高麗版一切經) 6285첩(帖)도 이시다가 봉납했다. 경판 모두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군사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의 5대 가신으로 큰 신임을 받던 이시다가 그 많은 ‘고려대장경’ 경판을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 강탈해 일본으로 옮겨갔는지는 아직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이시다가 험준한 고야산을 골라 전각을 세운 것은 이 귀중한 한국 국보급 경판들을 남몰래 지키기 위한 처사였던 것만은 쉽게 알 수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이러한 사실이 한국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9세기 초, 고야산에 공고부지를 개창한 구카이는 당시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781∼806 재위)의 윤허를 받고 왕도 헤이안경에서 당나라로 떠났다. 그의 나이 만 30세인 804년 5월12일이었다. 그러나 구카이는 왕명에 의한 당나라 유학 기간 20년을 어기고 불과 10분의 1에 해당하는 2년 만에 독단으로 귀국했다. 이는 당시로선 왕명 거역으로 큰 죄에 해당했다. 이 때문에 구카이는 헤이안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 큰섬인 규슈 지방의 다이자후(大宰府·정부 지방청사) 등에 머물고 있었다. 
◇구카이를 본존으로 모신 본당 부동당의 제단 모습.

다만 구카이는 당나라 귀국 보고서인 ‘어청래목록’(御請來目錄)을 헤이안경 조정에 제출했다.

이 무렵 구카이를 당나라로 보냈던 간무천황은 승하하고 그의 제1왕자인 헤이제이(平城·806∼809 재위)천황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이제이천황은 즉시 구카이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 관해 교토예술대학장이었던 저명한 문화사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 교수는 “공해 최초의 저작인 ‘어청래목록’은 그의 운명을 걸었던 일종의 변명서였다”(‘空海の思想について’ 1980)고 비판했다. 그는 “구카이 스스로가 ‘어청래목록’에서 밝혔듯이 ‘궐기(闕期)의 죄’는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가 재당 2년간 배워온 불법(佛法)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며, 그러한 불법을 어떻게 하여 빠르게 수용하였는지 명확하게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배워 온 것은 승려 불공(佛空)의 불교였다. 불공은 당의 현종∼숙종∼대종 세 황제에게서 총애를 받으며 불공삼장화상(佛空三藏和尙) 칭호를 받은 고승이다.

‘어청래목록’이라는 이 당당한 변명서는 그 당시의 권력자(헤이제이 천황)에게 구카이를 다시 바라보게끔 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 약 3년간 구카이는 다이자후에 머물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우메하라 교수는 “일본은 이상한 나라로서 야요이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부터 언제나 새로운 지식과 문물은 바다 건너 쪽에서 왔다”고 덧붙였다.

구카이가에 입경하도록 국왕의 윤허가 내려진 때는 809년 7월16일이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구카이는 입경하자마자 다카오산지(高雄山寺)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왕조의 번영을 위해서 수행하겠다며 조정에 상표문을 써서 바쳤다(‘性靈集’). 백제계 간무천황의 제2왕자 사가(嵯峨·809∼823 재위)천황이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구카이가 입경해 다카오산지에 들어가게 도와 준 이는 고승 사이초(最澄·최징·762∼822)였다.

사이초는 고대 일본 오쓰 지방의 신라인 후손으로 일본 천태종의 개조(開祖)다. 교토 동쪽 ‘비와코 호수’를 끼고 있는 히에이산(848m)의 엔랴쿠지(延曆寺)의 창설자였던 사이초는 구카이보다 12살 손위였다. 805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일종의 후학인 구카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이초는 806년 히에이산 엔랴쿠지 터전에서 일본 최초의 천태종을 개창한 뒤 812년 그가 도움을 건넸던 다카오산지의 구카이를 찾는다.

사이초는 구카이에게서 진언종의 교의(敎義)를 터득하기 위해 몸소 두 제자를 거느리고 관정(灌頂·밀교 의식으로서 수계자의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다)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 시절, 구카이는 유학(儒學)과 한서에는 뛰어났으나 불교에는 희박했다.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사이초가 소년 시절 열렬한 불교신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2세 때 승원(僧院)의 엄격한 계율 생활을 했던 것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구카이와 사이초는 교육이나 생활환경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에 먼저 유학하여 원(圓), 밀(密), 선(禪), 계(戒) 등 사종(四宗)을 배우고 돌아와 고승의 길에 접어든 사이초가 구카이로부터 관정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수도 자세는 개인적으로 존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구카이의 뛰어난 진언 밀교의 경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39세의 구카이가 812년 11월15일, 다카오산지에서 거행한 ‘금강계결연관정’(金剛界結緣灌頂)은 구카이의 밀교를 문자 그대로 부동의 것으로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이날로부터 일본에서는 비로소 순정(純正) 밀교가 확립된다. 이날 사이초 등 모두 4명이 관정했다.
◇고야산에 위치한 구카이 사당.

관정은 고대 인도 국왕의 즉위식에서 비롯됐다. 밀교에서는 불가에서 다시금 태어나는 것을 증거 삼기 위한 신묘한 의식이다. 어려서 유학에 심취했던 구카이는 당시를 다음처럼 술회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삼촌으로부터 매우 많은 시문(詩文)과 유학 등의 한서를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당나라에 가서 일본서 배우지 못한 것도 배웠다. 그러나 나는 불교에 관심이 워낙 컸기 때문에 한학자로서 입신하길 원치 않았다.”(‘文鏡秘府論’)

헤이안경에서 다카오산지에 있는 구카이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졌다. 구카이는 43세였던 817년 심산유곡인 고야산으로 들어가 공고부지의 새 터전을 닦는다. 그가 공고부지에 입주해 살게 된 때는 59세인 832년 8월부터였다. 이보다 9년 앞선 823년부터 구카이는 교왕호국사로서 사가 천황으로부터 헤이안경의 ‘도지’(東寺)를 물려받는다. 공고부지를 세우게 된 즈음이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건찰 이유에 대해 9세기 한 문헌은 “구카이는 비경의 깊은 산속을 걷다가 개 2마리를 거느리고 사냥꾼 모습을 한 사냥터명신(狩場明神)을 만났다. 구카이는 그의 안내로 연꽃잎을 연상시키는 봉우리로 둘린 유현한 고원에 살고 있다는 여신 니우쓰히메명신(丹生津姬明神)을 찾아갔다. 이때 여신은 ‘나는 신도(神道)로 큰 복을 누려온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정녕 지금 보살이 이 산에 오셨으니 내게는 행복이지요’라고 기뻐했기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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