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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61>진언종의 개조 `고호대사 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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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5-06 13:51:40 수정 : 2008-05-06 13: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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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족의 후예로 빈민층 교욱·구휼 헌신
◇1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교토의 명찰 ‘도지’의 금당.
일본에서 가장 높다는 목조 오중탑(55m)이 위치한 교토의 도지(東寺)는 1200년 역사의 사찰이다. 고호대사(弘法大師)에 의해 일본 진언종(眞言宗) 총본산이 된 이 명찰은 796년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781∼806 재위)이 헤이안경(平安京)의 정문(羅城門) 동서 양쪽에다 각기 왕립사찰인 교왕호국사(敎王護國寺)로서 개창했다. 서쪽의 사이지(西寺)는 1233년 화재로 사라져 현재는 공원터로만 남아 있다.

‘백제인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성을 다한 효자’(‘續日本紀’)로도 이름난 간무천황은 부처님의 가호로 왕도를 지키고자 했다. 도지의 정문인 남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중후한 2층 지붕 양식의 금당(국보, 1603년 재건, 천장 높이 12m)이 웅장하게 자리하며, 법당에는 서민의 병고를 다스린다는 약사여래상(중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일본 고대 불교를 논할 때면 응당 ‘고호대사’라는 시호를 받은 도지 가람의 고승 구카이(空海·774∼835)를 먼저 꼽게 된다. 도지 연혁에는 “왕으로부터 ‘대사’(大師)라는 시호를 받은 고승들은 많으나 ‘어대사’(御大師)로 불린 것은 고호대사뿐이다”고 설명돼 있다.

이를 증명하듯 일본 각지의 명찰에는 고호대사 구카이의 수행(修行)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도지 경내(남대문 왼쪽 어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에이후쿠지(叡福寺), 후지이데라(葛井寺),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 등 경내마다 큰 삿갓을 눌러쓰고 석장 지팡이를 짚은 ‘맨발’의 구카이 동상은 일본 서민들에게 숭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지 경내에 마련된 고호대사 좌상.              ◇도지 경내에 있는 목조 오중탑.

“길에 나서면 어대사님을 만나 동행한다”는 ‘동행2인’(同行二人), 즉 구카이 신앙은 많은 이에게 용기와 분발의 슬로건이었다. 빈곤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구휼에 힘쓴 구카이는 귀족이 아닌 빈민의 자제도 제한없이 공부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사립학교인 슈게이슈치인(綜藝種智院)을 도지 한 귀퉁이 귀족(藤原三守)의 저택에 세우고 ‘학교 무료 급식’ 제도를 실천한 독자적인 건학사업으로 사회에 공헌했다.

도지는 구카이가 62세를 일기로 입적한 날인 835년 3월21일을 기념해 매월 21일마다 금당 앞마당에서 고물상 행상들의 장터인 ‘고호’(弘法)를 연다. 특히 연말인 12월 21일의 마지막 장터 ‘시마이고호’와 연초 1월21일의 ‘하쓰고호’는 전국 각지에서 자그마치 1200명 이상을 헤아리는 노점상이 몰리고 20만명의 인파가 북적대는 서민 장터가 열린다. 국보만 치더라도 총 26점을 갖춘 문화재 보고인 도지. 그 경내 서북쪽 전당인 미에도(御影堂)는 구카이가 몸소 기거했던 곳으로, 구카이의 일본 국보 목조상(83.3㎝, 1233년 제작)을 보고자 하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구카이는 신라 신족(神族) 후예(‘日本高僧傳要文抄’ 13시기)라고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친정 아도(阿刀)씨는 불교와 유교에 상당히 학문이 높은 귀화(歸化)학자의 가문이었다”(中島尙志 ‘空海’ 1980)고 기록돼 있다.

구카이는 사누기 지방(지금의 가가와현)의 고을 원(‘直’)이었던 신라계 아버지 사에키노 다키미(佐伯田公)와 어머니 아도노 다마요리히메(阿刀玉依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호대사가 입적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달 21일 금당 앞마당에서 장터가 열려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구카이의 어릴 적 이름은 마오(眞魚)였으며 그의 수제자였던 신사이(眞濟)는 어린 날의 스승을 가리켜 “스님께서는 태어났을 때 총명했다. 남을 잘 보살폈다. 5, 6세가 지나면서 이웃에서는 신동이라고 불렀다”(‘空海僧都傳’ 9세기)고 전했다.

구카이의 불교 입문 과정에도 예외 없이 다른 고승들의 탄생설화 배경이랄 수 있는 성인(聖人)의 꿈 현몽이 전해진다. 구카이는 몸소 쓴 ‘유계이십오개조’(遺誡二十五個條)에서 “나는 대여섯살 어린 시절에 항상 꿈을 꾸면 여덟잎 연꽃(八葉蓮花) 속에 앉아서 여러 부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또 구카이가 12살 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신비한 고백도 언급돼 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는 꿈에 천축(인도)으로부터 오신 성승(聖僧)이 어머니의 품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난 뒤에 임신해 내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구카이의 외삼촌인 아도노 오다리(阿刀大足)는 당시 왕실에서 간무천황의 제3왕자 이요친왕(伊豫親王· ?∼807)의 스승인 시강(侍講) 벼슬을 하던 지체 높은 유학자였다. 소년 마오는 14살 때부터 왕도에 가서 외삼촌 밑에 살면서 공부했고, 18세가 되자 벼슬이 5위 이상인 귀족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는 국가 고등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의 명경도(明經道, 經書科)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유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배움의 과정에 대해 저명한 구카이 연구가인 나카지마 쇼시(中島尙志)씨는 다음처럼 지적했다. “구카이는 국수(國守)의 자제이며 또한 이요친왕(간무천황의 제3왕자, 필자주)의 시강인 외삼촌 아도노 오다리의 추천도 있어서 특별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일본 국보급 고문헌 ‘풍신첩’에 기록된 구카이 친필 족자. 구카이는 신라계 고승 최증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대학에서 그는 ‘모시’(毛詩)와 ‘좌전’(左傳), ‘상서’(尙書), ‘좌씨춘추’(左氏春秋) 등 한서(漢書)를 배웠다. 구카이는 불교의 길을 택하기 전에 유교를 배웠고 도교를 배웠다. 그는 문학도 했으며 글씨(書)도 썼고 더구나 세상 공기도 잔뜩 마시고 있었다.”

간무천황의 제2왕자였던 제52대 사가천황(嵯峨·809∼823 재위)은 당나라 유학승으로서 811년부터 친교를 맺어온 고승 구카이를 흠모하여 823년 그에게 교왕호국사(도지)를 직접 관장토록 했다.

일본에서 붓글씨에 뛰어난 명필로 꼽히는 이른바 삼필(三筆)로는 헤이안시대(794∼1192)의 사가천황과 구카이, 그리고 다치바나노 하야나리(橘逸勢) 셋을 꼽는다. 이로 미뤄 볼 때 구카이와 12살 손아래 사가천황의 교유 관계는 빼어난 붓글씨 솜씨와도 관련 있는 듯 보인다.

구카이가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은 804년 5월12일, 당시 나이 만 30세를 헤아리던 때였다. “구카이는 젊은 날 대학을 중퇴한 뒤 산림 속에서 수행하면서 밀교 경전의 수집에 힘썼다.”(宮崎忍勝 ‘新弘法大師傳’ 1967)

그 시절에 구카이는 삼론종(三論宗)의 뛰어난 고승인 곤조(勤操·758∼827)를 따랐다. 곤조는 신라인 계열의 고승으로서, “그는 하타(秦, 진)씨로서 구카이의 스승이며 도다이지(東大寺) 별당(別當), 왕실의 대승도(大僧都) 등을 역임했고, 입적한 뒤에는 승정(僧正)에 추서되었다”(三省版 ‘人名辭典’ 1978)고 설명돼 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기 전까지 ‘대일경’(大日經)에 능통했던 스승 곤조로부터 진언 밀교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구카이가 당나라로 유학하게 된 배경이었다.

구카이는 이요친왕의 시강인 외삼촌의 천거와 스승 근조 등 도다이지 고승들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 일반인은 꿈도 꾸기 힘들었던 관비 유학길에 올랐다. 구카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니와쓰(難波津, 오사카 나루터)에서 왕실의 사신 파견 제16차 견당선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정해진 유학 기간은 장장 20년. 그가 탄 배에는 당나라 파견 대사인 후지와라노 가도노마로(藤原葛野麻呂·755∼818) 등 외교 사절과 유학생들이 함께 탔다. 이 배는 자그마치 보름날 이상을 파도에 떠밀리다가 7월6일에서야 비로소 규슈의 쓰키시에서 당나라 쪽을 향해 닻을 올렸다.

견당사 등 구카이 일행이 왕도 장안에 당도한 것은 약 6개월의 긴 여정 끝인 그 해 연말인 12월21일이었다. 구카이는 유학승들이 거쳐야 하는 서명사(西明寺)에서 오래도록 머문 뒤 이듬해인 805년 6월에서야 스승인 청룡사 혜과(惠果) 스님을 만나 밀교 대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구카이는 당나라 귀국 보고서인 ‘어청래목록’(御請來目錄)을 통해 “성안을 두루 살피면서 명덕(明德)을 찾다가 청룡사 동탑원의 화상(和尙)인 법명 혜과아도리를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구카이는 그로부터 불과 2년이 채 안된 806년 8월, 독단적으로 귀국했다(岩波版 ‘일본사연표’). 20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년이라는 유학기간을 어긴 유학생은 어김없이 처벌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구카이는 왕실 제출용으로 ‘어청래목록’을 써서 당나라에서 가져온 서적과 만다라 그림 등 6종과 가지(加持) 기도용 법구 9종을 조정에 제출함으로써 화를 면했다.

다음 회에는 구카이가 43세였던 817년, 험준한 고야산(高野山, 와카야마현)에 밀교 수행의 도장인 공고부지(金剛峯寺)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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