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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미 표현과 권력화 [박영순의 커피 언어]

입력 : 2022-04-16 19:00:00 수정 : 2022-04-15 18: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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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애호가들에겐 “커피가 그 사람을 대신한다”는 믿음이 있다. 국내에서는 1999년 IMF체제 속에서 스타벅스가 상륙한 뒤에 이런 현상이 가시화했다. 테이크아웃 문화가 이즈음 본격화했는데, 손에 쥔 컵을 보고 지위나 취향을 가늠했다. 신세대의 커피 취향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끼 식사보다 비싼 커피를 즐기는 이를 ‘된장녀’라고 비하하는 바람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커피가 그 사람을 대변하는 이른바 ‘커피 아이콘’ 개념은 이렇게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왔다.

대체로 신맛이 거의 없고 탄 누룽지나 연기 느낌이 나는 커피를 ‘아저씨 커피’라고 부른다. 반면, 신맛이 강하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향이 은은하면 ‘귀부인 커피’라 칭한다. 이런 구분이 아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1960∼1970년대 설탕과 크림을 직접 타 마시는 다방커피를 자주 접했던 남성들은 “커피는 자고로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1980년대 여유가 생겨 남편을 출근시키고 집안 청소를 마친 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즐겼던 주부들은 헤이즐넛 커피야말로 기품 있다고 생각했다. 커피 취향은 이처럼 시대를 반영한다.

2002년 월드컵을 지나면서 커피전문점은 빅뱅 시대로 접어들어 경쟁이 치열해졌다. 업체들의 차별화 포인트는 맛에 맞춰져 ‘스페셜티’가 급부상했다. 2010년도 들어 커피 산지를 구체적으로 따지고 좋은 맛을 추구하는 커피애호가들이 늘면서 대형프랜차이즈는 고급커피를 제공하는 매장을 별도로 만드는 지경이 됐다.

소비자들이 맛에 눈뜸으로써 약 200년 전 프랑스의 브리야사바랭이 던진 화두를 풀기 위해선 더 깊은 사유가 필요해졌다. 어떤 커피를 마셨는지 보다 커피를 마시고 느낀 바를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17∼18세기 브리야사바랭의 시대에 귀족은 더 이상 붉은 고기를 즐기지 않았다. ‘전투귀족’에서 ‘궁정귀족’으로 바뀌면서 조류처럼 희고 가벼운 고기를 먹는 것이 문화적으로 더 세련된 것으로 간주된 탓이다. 모두 흰 고기를 먹는 세태에서 차별화는 테이스팅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비로소 갈린다. 와인의 품계처럼.

커피는 향미 묘사를 즐기는 문화 속에서 더욱 권력화하고 있다. 아무리 좋고 비싼 커피를 마셔도, 그 커피가 주는 관능적 아름다움을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면 권위를 갖기 힘들다. 커피가 ‘이국성’을 지닌 탓에 관능 표현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같은 내용이라도 점수가 박하다. 예컨대 “숭늉처럼 구수하다” 보다는 “베이크드 바스마티 라이스 앤드 브라운 로스티드(baked Basmati rice and brown roasted)”라는 표현을 더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가을 들판에 서 있는 것 같다”보다는 “스트로이 앤드 어시(strawy and earthy)”를 더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커피 향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어려워 보이는 용어를 구사하는 전략으로 권력을 쟁취한 탓이다.

물론 커피 향미 표현에 정제된 용어, 즉 렉시콘(lexicon)을 사용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권할 만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커피 향미를 지각하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선천적인 것이다. 용어는 후천적인 학습의 문제이다. 커피를 마시거든 아는 단어로 편하게 느낌을 말하자. 그것을 전문용어로 정리해 전달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 이상이 되어선 안 된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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