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을 일하고 퇴직을 하루 앞둔 2016년 12월 24일, 야구장의 철망 보수작업을 위해 높은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던 그의 휴대전화 수신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발신처는 회사일로 바빠서 며칠 전에야 겨우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 “선생님, 아무래도 위암 같습니다. 병원에 오셔야겠어요.”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한 결과 위암으로 판정이 났다. 3시간여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이듬해 봄, 항암치료 중이던 그는 완주군 수만리 위봉산 자락 밑에 위치한, 여동생의 소개로 1년 전 나무가 좋아 샀던 시골집으로 혼자 들어왔다. 짐 하나 없이 빈 몸으로. 계곡이 많아 물이 넉넉한 ‘수만리’는 수묵화 같은 안개를 자주 선물했다.
병원 외래를 하며 치료를 꾸준히 이어가는 한편, 그는 몸도 열심히 움직였다. 호미로 밭을 파고, 채소를 심고, 돌을 날라 집 뒤에 담을 쌓고, 꽃을 가꾸고…. 일이 힘들 때에는 페이스북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어느 새 건강을 회복했고, 힘든 항암 치료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정상인보다 밥을 더 잘 먹는다고.
“평생 그리던 시골집 하나 사놓고/ 덜컥 아팠다/ 속살이 타버린 줄도 모르고/ 하루를 못 버티고 다들 떠난/ 마찌꼬바 용접사로 삼십여 년 살았다/…첫닭이 울면 어둑어둑 비질을 하고/ 동네 한 바퀴 돌아야지/ 뚝뚝 지는 능소화 꽃잎을/ 아침마다 주워야지/ 잉그락불 같은 채송화를 마당 가득 심어야지”(「귀향」 부문)
작은 영세 공장, 이른바 ‘마찌꼬바’ 용접사로 30년 넘게 일하다가 귀향해 생애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삶창)을 펴냈다. 등단 30여 년 만이었다. 노동자 시모임 ‘일과 시’ 동인으로 활동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의 동생이기도 한 김용만 시인. 그의 첫 시집은 주요 서점에서 시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시인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큰 화제를 낳았다. 시인 김용만에게 도대체 30년 만의 첫 시집은 무엇이었을까.
김 시인을 만나기 위해 지난 9일 일찍 완주로 향했다. 전주역으로 마중 나온 그의 차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위봉산 자락에 걸친 그의 집에 닿았다. 인터뷰 내내 강아지 ‘소양이’가 그의 품을 자주 파고들었다.
처음 그가 위봉산 자락으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과 얘기할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겨울에는 1주일 내내 사람 한번 보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소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잔가지 밑에 있던 두꺼비를 밟을 뻔했다가 급하게 발을 뺐다. “아이, 너 이 새끼,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두꺼비가 나무와 비슷한 색이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시골에 온 이후 처음 말을 했다.
“우리 집 두꺼비가 죽었다/ 아무리 느려도/ 도로 건널 때는/ 좀 서둘러라/ 신신당부했는데/ 아이고 속 터져/ 차에 치여 죽었다/ 오늘 인간인 내가/ 종일 미웠다/ 나는 아니라고들 하지 말라”(「두꺼비」 전문)
-시 마지막의 ‘나는 아니라고들 하지 말라’는 구절에서 뜨끔했다.
“전봇대의 가로등이 켜지면 두꺼비들이 전봇대 밑에 나오곤 했다. 전봇대 주위를 빙빙 돌다가 떨어지는 날파리를 주어먹기 위해서다. 차에 치일까봐 두꺼비를 몇 번이나 안전한 곳에 옮겨주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나가려다가 내장이 터져 죽어 있는 두꺼비를 발견하고, 속이 얼마나 아프던지…죽은 두꺼비를 능소화 밑에 묻어줬다.”
그의 시집에는 시골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벼와 배추, 담장이풀, 밥풀, 코딱지나물 등 많은 식물이 대지 곳곳을 수놓고 두꺼비나 개구리, 고라니, 멧돼지, 달팽이, 딱새 등 동물들도 자주 출몰한다.
“산중의 봄은 빗소리로 온다/ 산 넘어 자박자박 온다// 위봉산성 내리막길/ 불빛 따라 언뜻언뜻 뛰던/ 개구리, 두꺼비는/ 찻길 무사히 건넜을까// 나는 돌아와 누웠는데/ 길 건너다 깔린/ 저 작은 목숨들/ 새벽에야 생각나네// 인간들은 왜 자꾸 남의 봄을 빼앗나/ 지들 봄이나 잘 챙기지”(「지들 봄이나 잘 챙기지」 전문)
-‘인간 지들 봄이나 잘 챙기라’는 말은 왜 서늘한지.
“어느 비오는 날 차를 끌고 고개를 넘어오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에 개구리들이 뛰는 모습이 보이더라. 앞차에 치어 죽은 것들도 있었다. 잊고 있다가 새벽에 깨서 여러 생각을 하다가 그 모습이 떠오르더라.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보면 밤에 죽은 개구리 사체들을 물까치들이 뜯어 먹거나 물고 도망간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들은 참 잔인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정겹기 그지없다. 거의 매일 만난다는 학동마을 옛 이장. 타고 온 자전거를 논 가상에 삐딱하게 세우고 논을 살피면서 툭툭 건네거나 받는 그의 말을 타고 깨달음과 함께 행복도 밀려오는데.
“학동마을 구 이장님/ 장마철에도 또랑에/ 물이 없다며 마른장마라며/ 논 가상에 자전차를 삐딱하게 세운다// 온종일/ 천둥소리 자갈자갈/ 돌 구르듯 끓어도/ 찔끔찔끔 애간장을 녹인다// 난 하느님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 암 소리 안하지만/ 낼 아침 구 이장님에게/ 하느님은 틀림없이 또 한소리 듣겠다”(「하느님도 혼나야지」 전문)
-학동마을 구 이장님을 자주 만나나.
“거의 매일 만나 대화한다. 어제도 고추에 병충해가 없네요, 라고 하니까, 병충해는 없는데 고추가 많이 열리지 않아 작년보다 수확이 못하다고 하더라. 옥수수 씨를 보며 우리 것은 적어요, 라고 하니까, 농협에서 새 씨를 받으면 크게 잘 자라는데 시장에서 사서 심어서 그렇다고 말해주더라. 이런 이야기를 매일 한다. 배우기도 하는데, 대화하면 행복해진다. 요즘은 구 이장님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이 매일 농약통을 매고 다닌다.”
시인 김용만은 1956년 전북 임실 덕치마을에서 ‘지게였던 아버지’와 ‘호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4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다 쓰러져가는 마루 기둥에 검정고무신 산 날을 새겨놓을 만큼 가난했다. 매와 욕이 난무하던 시절, 아버지는 자식들을 때리지 않고 묵묵히 성실하게 일만 했다, 마치 지게처럼.
“난 아버지의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지게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발 한발 무겁고 신중하셨다/ 가족들이 먹을 밥을 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진한 갈색 물이 얼룩진 옷을 입고 다니셨는데/ 옷마다 풀물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죽으면 푸른 풀꽃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신발 가득 풀씨들을 넣고 다녔기 때문이다”(「풀씨」 전문)
‘양글이’라고 불린 어머니는 야무졌다. 체구는 작았지만 입담도 좋았다. 식구들은 엄마를 닮아 유머가 좋고 입담이 좋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집은 뭐가 그렇게 재밌어, 라고 할 정도로 항상 웃음이 마당을 넘었어요. 어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개떡이라도 먹여 보냈지요. 장사치들이 우리 집을 찾아 자리를 틀곤 했어요. 어머니가 잘했기 때문이죠.”
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7년 계간지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사이 1985년쯤 상경해 시골의 형들을 따라다니며 아파트 등 각종 건축 현장에서 일했고, 잡지사에서도 3개월 정도 일했다.
-어떻게 문학의 숲에 들어온 건가.
“아무래도 큰 형(김용택 시인)의 영향이 컸다. 형은 독학을 했는데, 공부를 엄청나게 했다. 방에 들어가면 항상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1985년 형의 첫 시집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학교 다니면서도 문학 쪽에 관심이 있어서, 글을 써 신문사에도 내보기도 했다.”
-‘구로노동자문학회’와 노동자 시모임인 ‘일과 시’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국어교사를 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고향 형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했다. 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구로노동자문학회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했다. 송경동, 황규관, 조기조 시인 등이 당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다. 가난했지만 모여 공부하고 술을 먹었다. 저는 앞서지 못하고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
35세이던 1990년, 그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아내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부산으로 시집을 갔다’고, 그는 표현했다). 아내는 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 부산에서 30여년을 살았다.
-아내는 어떻게 만났는지.
“아내 역시 부산노동자문학회 출신으로 노동자문학회 대동제 등을 하게 되면 가끔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한번은 구로에서 상경한 아내와 회원들에게 고기를 사줬는데, 이를 계기로 자주 만나게 됐다. 저는 그때 돈도 없었고, 모으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고마워서 결혼하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를 ‘재수’라고 표현했다, 재수라고. “학교 다니면서 무엇이 되겠다/ 돈을 벌겠다/ 걱정 안했다// 그냥 친구 만나/ 열심히 술 먹고 사이좋게 놀았다// 세상 이만한 공부가 어디 쉬운가// 아내는 이런 나를 용케 잡았다// 이만한 재수 어디 있는가”(「재수」 전문)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그는 쉬이 직장을 잡지 못했다. 직업소개소를 찾았지만, 다소 엉뚱한 일을 소개받았다. 무슨 일을 할까, 하고 고민하면서 부산 서면 근처를 걷고 있을 때 길가에 위치한 조그만 공장이 보이는 것 아닌가. 노동자 4, 5명이 쇳가루가 자욱한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 일 좀 하고 싶은데요.”
“어서 오세요, 내일부터 당장 일하러 오세요.”
곧바로 취직한 곳은 노동자 몇 명이 일하는 ‘마찌꼬바’였다. 당시는 활황으로 매일 일손을 구할 때였다. 첫 월급으로 24만원 정도를 받은 그는 이후 30여 년간 마찌꼬바에서 일했다.
-부산에서 무슨 일을 한 것인가.
“부산 서면 바로 옆에 위치한 마찌꼬바였는데, 용접을 해서 간판을 만들고 밤에 설치하는 간판 일을 중심으로 여러 일을 했다.(왜 용접사가 됐는지) 용접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하나도 못했지만 데모도 하면서 하나씩 배워갔다. 일해 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머리를 쓰지 않으니까 너무 좋았다. 사람들과 정이 들면서 떠나지 못했다. 성실하게 일했다. 작업복을 입고 가장 먼저 가서 문을 열고 청소했다. 근방 사람들은 소문이 나 있다. 나중에 공장이 커지고 직원들이 많이 늘어난 뒤에는 공장장이 됐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누비며 일했는데, 서울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의 경우 제가 거의 다 만들어서 설치했다. 부산에서 용접하고 도장은 다른 곳에서 한 뒤 싣고 올라와서 설치했다. 그거 하면서 손을 다쳤다. 회사가 잘돼 한 달에 100시간 넘게 야간작업을 했다. 30년 넘게 그렇게 일했다.”
아내는 그가 하는 일에 ‘태클’을 걸지 않았지만, 시인이면서도 시집을 내지 못한 것에는 늘 안타까워했다. 매일 이른 새벽 출근과 늦은 밤 귀가, 시멘트 바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뒹구는 노동, 시커먼 작업복…. 동료 시인들로부터 시집을 받으면 부부 싸움을 하곤 했다고, 그는 당시 시에 그렸다.
“내 아내 맨날 뭐라 한다/ 오십이 넘어도 시집 하나 내지 못하고/ 남의 글이나 읽고 산다고// 시인들아/ 우리 집에 책 보내지 마라/ 부부 쌈 난다”(「못난 시인」 전문)
마찌꼬바 노동자였던 그가 완주 위봉산 자락으로 귀향해 건강도 회복하고 등단 30여 년만에 첫 시집을 펴낸 것이다. 시들은 새벽 산과 들을 감싼 안개에서 몰려오기도 했고, 꽃이나 풀로 올라오기도 했으며, 눈으로 내리기도 했으니.
“눈 온다/ 정말 시처럼 온다/ 뭘 빼고/ 더 보탤 것도 없다// 넌 쓰고/ 난 전율한다// 시는 그런 것이다”(「폭설」 전문)
첫 시집에 실린 그의 시들은 요즘 우리 시들과 달리, 길지 않고, 어렵지 않으며, 관념적이지도 않다. “텃논 모가 뿌리를 잘 내렸다. 저 가지런한 가난이 내가 꿈꾸는 시다”는 ‘시인의 말’처럼, 짧으면서도, 시상이 분명하며, 구체적이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려서 대지의 존재들과 소통하는 그런 시편들.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시인」 전문)
-너무 길고 어렵고 현학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요즘 시들과 많이 다른데.
“「시인」은 우리 시인들에 대한 당부이자 부탁이고, 한편으론 저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그동안 시인들이 독자를 떠나게 한 측면도 없지 않다. 자신과 동떨어진 얘기를 많이 했다. 글을 만들고, 꾸미면서, 마치 많이 아는 것처럼 가공하기도 했다. 대학에 문창과가 생기면서 심화한 측면도 있다. 경험에서 쌓여 육화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마치 암기 교육하듯이 기술자를 만드는 것 같다. 왜 독자들이 떠났느냐, 그건 시인들이 잘 못한 것이다. 독자들이 다시 찾아오게 하고, 다가가야 한다. 시라는 것은 만들면 안된다. 거짓 없이 자연과 세상을 대하는 것이 시구나, 하는 확신을 갖는다.”
인터뷰 내내 이제 대시인이 된 큰 형 김용택 얘기는 조심스러워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자칫 큰 형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그는 “형님과 시대를 같이 논의해 본 적도 없고, 형도 터치를 안했으며, 집안에 요만큼도 입김이 없으셨다”고 했다. 김용택 시인과 관련해 들려준 이야기는 이번에 그가 첫 시집을 내자 걸어온 전화 통화 이야기가 전부.
“용만아, 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아프면서 돌 담 쌓고, 글을 쓰면서 자리를 잡았구나. 자다가 일어나서 시집을 읽다가 행복하다, 내가 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어떻게 쓰는가.
“일하거나 산책하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핸드폰 등에 바로 메모한다. 한 문장을 쓰고 다음 말들을 기다린다. 일기를 쓰니까, 일기에 시를 쓰기도 한다. (이때 그는 정자로 쓴 일기를 잠깐 보여준다) 5년간 매일 일기를 써왔다. 시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저는 그냥 빗자루로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벌써 전원생활 5년차인데, 하루 생활은 어떤지.
“여기 하루가 보기보다 빡빡하다. 매일 꽃과 뒤에 텃밭을 가꾸고, 밥하고 설거지하며, 빨래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매일 소양이 산책도 시켜줘야 한다. 처음 생활의 70%가 소양이와 관련이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길을 나서는 기자에게 시인은 텃밭에서 기른 토마토 3개와 순두부 도넛을 챙겨준다. 집으로 돌아와 토마토와 도넛에 설탕을 쳐서 아들과 함께 먹었다. 아주 오래 전 맛이 났다. 곧이어 어떤 그리움이 피어오르는데, 휘익~휘익~.
완주 위봉산 자락에서 거대한 관념이 아닌, 작지만 구체적인 일상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시인의 모습이. 고추 농사를 지어서 방앗간에 찢어서 돌아오는 길, 차 뒷좌석에서 흘러나오는 알싸한 냄새, 자꾸 뒤의 조마니로 돌아가는 눈길, 고갯길 넘어오면서 차오르는 행복감, 행복한 서 근 반의 무게가….
“빗방울이 새벽 지붕을 두드린다/ 산중 빗소리는 늘 요란하다/ 오늘은 위봉산성 너머/ 소양에 나가 고추 방아를 찧었다/ 두근거리는 서 근 반/ 아름다운 무게다/ 뒷좌석에 싣고/ 되돌아 넘는 고갯길/ 왜 이리 옹골지고 호복한지/ 사람들은 모른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알싸한 매운맛/ 가난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서 근 반/ 이 작은 조마니의 무게를”(「서 근 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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