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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 태풍이냐, 허리케인이냐”… 러 나발니 영향력 관심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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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3-06 11:00:00 수정 : 2021-03-06 17: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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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뻔히 알면서 왜 귀국했을까
2014년 집유 판결 취소 1심 넘겨져 수감
항소심도 실형 유지… 2년 6개월 복역해야
형 늘어나거나 감옥서 살해 시나리오도
독극물 공격에 獨서 생사 넘나드는 치료
블로거·유튜버 활동… 극우 민족주의 표방
국민 ‘민주주의 영웅’으로 생각할 지 의문
푸틴, 개헌 통해 2036년까지 연임 길 열어
러 전문가 “독재자 중심 독재체제의 숙명
본인 안위 보장 어려워 정권 놓지 않을 것”
“대선 일정 고려 땐 2023년엔 결단 내려야”

‘다윗’ 나발니는 ‘골리앗’ 푸틴을 넘어뜨릴 수 있을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달 20일 열린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달 독일에서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2014년 선고받은 집행유예 판결을 취소하는 1심에 넘겨져 수감됐는데, 이번에도 실형 판결이 유지됐다. 재판부는 그가 집행유예 판결의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댔지만, 실은 독극물 공격에도 살아 돌아온 그의 손발을 묶어 두려는 크렘린(대통령궁)의 의도가 다분하다.

나발니는 2년 6개월 동안 복역하게 됐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할 뿐 다른 혐의가 추가돼 형이 늘어나거나 심지어 감옥에서 살해될 것이란 시나리오도 있다. 반대로 나발니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과민한 반응이 푸틴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분석도 있다.

푸틴은 왜 그토록 정권 연장에 목을 맬까. 나발니는 체포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왜 굳이 러시아로 돌아왔을까. 이 두 물음을 통해 러시아 정세를 짚어본다.

◆‘왜’ 푸틴은 차르를 꿈꾸나

1999년 12월31일, 새해를 하루 앞두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당시 총리였던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튿날 푸틴은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새천년 축하연설’을 하며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과시한다.

석달 뒤 열린 대선에서 그는 압도적 표차로 경쟁자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현재까지 21년 중 17년을 대통령으로, 중간 4년은 ‘대통령인 듯, 대통령 같은’ 총리로 재임하며 21세기 차르(제정 러시아 황제)의 길을 걷는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개헌을 단행했다. 헌법의 3연임 금지 조항으로 그의 임기는 2024년 종료되는데 개헌을 통해 그의 기존 임기를 백지화했다.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연속으로 대통령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는 소련의 악명 높은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29년 재임)보다 더 오래 집권하게 된다.

러시아 전문가인 티머시 프라이 미국 컬롬비아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푸틴의 정권 연장은 ‘독재자 중심 독재체제’(personalist autocracy)의 숙명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독재는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 푸틴이나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처럼 개인의 카리스마에 기반한 독재자 중심 독재가 있고, 중국처럼 특정 정당에 권한이 집중된 일당독재와 미얀마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시절의 칠레 같은 군부독재 유형이 있다.

독재 유형은 권력이양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인 고맨스 미 로체스터대 교수가 이 분류에 따라 1946∼2008년 비민주 국가에서의 권력이양을 살펴봤더니 독재자 중심 독재에서는 70%의 통치자가 혁명이나 무력으로 실권했다. 이에 비해 일당독재에서는 19%, 군부독재에서는 47%의 통치자가 본인 뜻에 반해 실각했다.

독재자의 말로도 독재 유형에 따라 달라졌다. 수감되거나 추방·사망 등 비극적 최후를 맞을 확률이 군부독재에서는 41%, 일당독재에서는 25%인 데 비해 독재자 중심 독재에서는 80%나 됐다. 군부나 정당이 독재의 축일 때는 실권한 독재자가 다시 군이나 당의 일원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독자자 중심 체제에서는 이런 방어막이 없기 때문이다.

프라이 교수는 이런 결과를 토대로 “통치자들은 본인의 안위가 보장된다고 느낄 때 물러나는데, 독재자 중심 체제에서는 이런 상황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푸틴 역시 정권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제성훈 한국외대 교수(노어과)는 “푸틴도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푸틴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이어갈 지 고민이 깊다. 후계자를 지명할 수도 있고, 벨라루스와 국가연합을 해서 초대 대통령이 되는 방법도 있다. 국가지도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만들 수도, 아니면 물러난 뒤 당을 통해 지배력을 이어갈 수도 있다. 개헌도 여러 옵션 중 하나였다”며 “다음 대선 일정을 고려하면 2023년에는 어떤 길을 갈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 나발니는 독일에서 돌아왔을까

나발니는 지난해 8월 국내선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누군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독극물 ‘노비촉’에 노출시킨 것이다. 그는 러시아 옴스크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독일로 이송됐다. 생사를 넘나드는 5개월의 치료를 마치고 그는 지난달 러시아로 돌아왔다.

체포는 예견된 결과였다. 크렘린은 반기를 드는 지도자에겐 가차없는 응징을 가하곤 했다. 러시아의 체첸 공격을 줄기차게 비난하던 언론인과 연방보안국(FSB) 요원이 2006년 잇따라 총에 맞거나 방사성 물질에 노출돼 숨졌다. 2015년엔 옐친 때 부총리를 지낸 보리스 넴초프가, 이듬해엔 야당 하원의원이 총에 맞아 숨졌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병상에 있는 동안 한 번도 귀국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위험에 굴하지 않는 투사, 신뢰할 만한 야권 지도자란 이미지는 더 공고해졌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그러나 푸틴에 맞선다 해서 그를 ‘민주주의 영웅’으로 치켜세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의 사상은 극우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블로거와 유튜버로도 활동해 온 그는 2007년 한 치과의사 차림으로 등장해 러시아의 충치를 치료하려면 외국인 이주자를 러시아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무슬림 이민자를 바퀴벌레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동안 네오나치즘을 표방하는 ‘러시아 행진’(Russian March)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그가 전략적으로 극우 민족주의를 차용했을 뿐이라거나 최근에는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다.

독재에 관해 11권의 책을 쓴 러시아계 미국인 기자 마샤 게센은 최근 시사주간 뉴요커에서 “러시아에는 민족주의 이념이 (좌·우파식의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며 “여기 전혀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정치 조직화 초기 단계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손잡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나발니 석방을 요구하거나 그에게 연대를 표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독극물 중독→귀국→수감’으로 이어지는 나발니의 서사가 푸틴의 자리를 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독립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의 최근 조사에서 푸틴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이후 1%포인트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 10명 중 6명 이상(65%)은 여전히 그를 지지한다.

러시아의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 2월 20일(현지시가) 모스크바의 바부쉬킨스키 구역 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출장 재판에 출석해 유리로 만든 피고인 대기실에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모스크바=AP연합뉴스

나발니는 귀국 후 ‘푸틴 궁전’이라는 영상을 공개했다. 푸틴의 비리를 공개하는 야심작이었지만, 영상을 본 러시아인들 중 푸틴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는 응답자는 17%에 그쳤다. 77%는 ‘변하지 않았다’고 했고, 되레 ‘더 좋아졌다’는 응답자(3%)도 있었다.

제 교수는 “나발니를 체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며 “최근 벌어지는 시위도 규모 면에선 큰 편이지만 ‘나발니 석방’, ‘푸틴 사임’이란 구호를 빼면 참가자의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다. 구심점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의미”라고 했다.

물론 변화의 조짐도 있다. 최근 1년 동안 젊은 유권자(18∼24세) 사이에서 푸틴의 인기는 16%포인트나 하락했고, ‘나라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응답자(48%)도 절반에 가까웠다. 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친숙한 유권자일수록 나발니에 호의적인 점도 일흔을 바라보는 푸틴에겐 신경 쓰이는 점이다.

나발니는 2019년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에서 ‘스마트 보팅’ 선거 전략을 도입했다. 스마트 보팅은 유권자가 거주지를 입력하면 선거구에서 여당인 통합러시아당(UR)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를 알려주는 앱이다. 이 전략으로 UR는 의석의 3분의 1을 잃었다.

러시아는 오는 9월 총선을 치른다. 옥중 나발니의 영향력이 찻잔 속 태풍일지 판도를 흔들 허리케인일지는 7개월 뒤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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