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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쓴 '그놈들'… 미성년 성폭력, 막을 법이 없다 [심층기획 - 청소년 성 노리는 '온라인 그루밍']

입력 : 2020-09-21 06:00:00 수정 : 2020-09-23 10: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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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그루밍 처벌법’ 입법 요구
친밀감 쌓은 뒤 ‘성착취 올가미’… ‘그놈’들 접근부터 처벌해야
심리적 유대감 형성한 뒤 ‘늑대 본색’… 피해자들 16세 이상 아동·청소년 46%
청소년 10명중 1명 “온라인서 피해 경험”… 성적 촬영물 유도 등 처벌법 여전히 공백
#1. 부모님의 이혼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라온 A(17)양은 마음 한쪽에 항상 외로움이 자리했다. 외롭다는 생각에 극단적 선택까지도 시도했던 A양에게 가해자가 다가온 건 열두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온라인 게임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가해자는 A양에게 입에 발린 따뜻한 말과 다정한 듯한 속삭임을 건넸다. 가해자와 채팅 이후 A양이 호감과 신뢰를 보이자 가해자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해자의 채팅 문구는 점차 성적 유인으로 변했고, 끝내 A양에게 성관계까지 요구했다. 이미 ‘온라인 그루밍’을 당한 A양은 요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가해자는 A양과의 성관계 이후 종적을 감췄다.

 

A양을 면담한 정혜원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여성정책연구팀장은 “가해자는 A양이 갖고 있는 취약성을 간파하고 끊임없이 유혹해 성 착취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 그루밍이란 성 착취를 위해 아동·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온라인을 통해 친분·신뢰 등을 쌓아 심리적으로 지배한 후 가해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여중생 B양은 영상 채팅앱을 통해 만난 C(19)군으로부터 온라인 그루밍을 당했다. C군은 2년 전 온라인상에서 만난 B양과 심리적 유대관계를 형성한 뒤, 점차 B양의 성에 대한 호기심을 이용해 성적 영상을 찍어 보내도록 유도했다. B양으로부터 영상을 확보하자 C군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는 ‘영상을 부모 등에게 전송하겠다’고 협박하며 지속적으로 성 착취 영상을 요구했고, 영상을 빌미로 금품 갈취와 성폭행까지 저질렀다. 지난 6월 C군은 B양을 포함해 여중생 총 3명으로부터 58차례에 걸쳐 성 착취 영상을 전송받는 등의 혐의로 법원에서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동·청소년들의 피해가 심각한 온라인 그루밍을 예방하기 위해 가해자들의 접근 초기부터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온라인 그루밍 처벌 법안’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n번방’ 사건을 계기로 활발해진 정치·법조계의 논의를 토대로 온라인 그루밍 처벌법 입법과 함께 오프라인 그루밍을 막기 위한 총체적인 제도 마련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만·협박·회유’ 능수능란한 ‘온라인 그루머’

 

20일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치안정책연구’ 최신호에 실린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의 실태와 대책’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로 2017년 신상정보 등록대상이 된 범죄자 중 온라인 그루밍 범죄자(이하 온라인 그루머)는 642명(15.3%)에 달했다. 연구자인 김지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당시 판결문 4201건을 전수조사했다.

 

‘온라인 그루머’의 성별은 남성이 98.4%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20∼30대가 10명 중 7명(72.6%)에 달한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진 성범죄 사건에서 20∼30대가 차지한 비율(42.2%)보다 높은 수준이다. 온라인 그루머들의 신상정보 공개 여부를 살펴보면, 비공개 처분이 92.4%로 일반 성범죄자(86.3%)보다 비공개율이 높았다.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16세 이상 아동·청소년이 45.5%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13∼15세(42.7%), 7∼12세(11.8%) 등의 순이었다. 13∼15세 피해자 비율의 경우 해당 연령의 일반 성범죄 피해자(31.5%)보다 10% 넘게 높았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온라인 그루머들이 ‘기만’, ‘협박’, ‘회유’라는 전형적인 범죄 수법을 이용한다고 분석했다.

 

실제 아동·청소년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는 이번 조사 결과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온라인 그루밍의 특성상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의 개인정보나 둘 사이에 나눈 성적 대화·이미지 등으로 협박해 신고를 막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의 2018년 상담사례를 살펴보면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한 비율은 30.8%로 불법촬영(40.5%), 비동의 유포(44.7%) 등에 비해서도 낮은 신고율을 나타낸 바 있다.

◆표적 되기 쉬운 청소년들…“입법 시급”

 

전문가들은 요즘 청소년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자신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데 거부감이 적은 만큼 온라인 그루머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상황이라고 경고한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6월 발표한 ‘2019년 성매매 실태조사’를 보면 전국 중·고등학생 64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학생 10명 중 1명(11.1%)이 지난 3년간 인터넷을 통해 원치 않는 성적 유인 피해를 당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최근에는 n번방 사건 등을 계기로 온라인 그루밍이 오프라인 성범죄의 예비적 준비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심각한 성 착취·학대라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온라인 그루머들이 아동·청소년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를 처벌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들이 성적 목적을 갖고 아동을 유인하는 과정·행위를 모두 법적으로 제재해 아동·청소년 성 착취를 예방하자는 것이다.

 

김여진 한사성 피해지원팀장은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가장 큰 문턱은 적용 법이 미비하다는 점”이라며 “아동·청소년 피해자에게 접근해 성적 촬영물 전송을 유도하는 행위에 대한 적용 법은 여전히 공백인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현행법은 아동·청소년에게 ‘성 구매’를 위한 목적으로 유인·권유하는 행위만을 처벌할 뿐 온라인상에서 성적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에게 접근해 대화하거나 유인·권유하는 행위 자체를 처벌하지 못한다.

 

현행법을 보완하고자 최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과 진선미 의원은 온라인상에서의 성적 유인·권유 행위를 구체화해 이를 처벌하고, 경찰이 온라인 그루머들의 범행 증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위장수사를 허용하는 내용 등을 담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들은 지난 16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상정됐으나 야당에서도 관련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라는 이유 등으로 이번 본회의에는 부의하지 않기로 의결됐다. 권인숙 의원실 관계자는 “잠정적으로는 오는 11월쯤 (야당안과 함께)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온·오프라인 그루밍 총체적으로 논의해야”

 

온라인 그루밍 처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그루밍 성범죄의 다양한 양태를 모두 처벌할 수 있을 만한 제도를 마련하는 쪽으로 사회적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잇따른다.

 

윤정숙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에 입법화가 된다면 온라인 그루밍 자체는 규제할 수 있겠지만, 풍선효과로 인해 범죄자들은 다른 식의 그루밍을 사용할 것”이라며 “어찌 됐든 그 (새로운) 방식은 아이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성적 목적을 갖고 (아동·청소년과의) 만남을 위해 이동하는 행위와 만남 자체를 규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우리 사회가 온라인 그루밍으로 피해를 본 아동·청소년들에 대한 보호방안 강화와 예방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마련 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성이 제기된다.

오세연 세명대 교수(경찰행정학)는 “(온라인 그루밍) 사건 이후 아동·청소년의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등의 불안한 심리상태는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를 수사할 전문 수사관을 둔 전담팀과 관련 기관 및 단체와의 협력을 통한 사회안전망의 구축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 교수는 “(온라인 그루밍에 대한) 형식적인 분기별 교육이 아니라 각 연령대에 맞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지속적으로 아동·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단계별 사전예방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처벌과 아울러 피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교육과 시스템 마련도 요구된다. 정혜원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여성정책연구팀장은 온라인 그루밍 처벌법 마련과 함께 △한국형 ‘아동·청소년 온라인 성 착취 방지센터’ 신설 △영상물 삭제 지원 등 피해자 지원 강화 △온라인 그루밍에 대한 홍보 및 가이드라인 마련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피해 아동·청소년 상담을 위한 전문가 교육 실시 등을 주문했다.

 

◆英·호주 등 온라인 통한 아동 성접촉 모두 범죄화

 

아동·청소년 대상 ‘온라인 그루밍’ 사례가 잇따르자 세계 각국은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제도 마련에 나서고 있다. 영국과 호주 등 다수 국가에선 성적 목적을 갖고 온·오프라인으로 아동과 접촉하려 계획하거나 시도하는 행위 자체를 제재하고 있다.

 

20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등에 따르면 영국은 일찌감치 ‘성범죄법’ 제정을 통해 아동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성적 그루밍 행위를 모두 범죄화했다.

 

영국은 인터넷 발달에 따른 그루밍 범죄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성범죄법을 통해 18세 이상 성인이 16세 미만 아동을 성적인 행위를 할 의도로 만나거나 유인하는 행위를 처벌한다.

 

2015년에는 가해자가 오프라인 만남의 목적 없이 온라인상으로만 아동의 성을 착취했을 때 법적 처벌이 어렵다는 한계를 보완하고자 성인이 아동을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도 성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의도를 갖고 온·오프라인으로 아동에게 접촉했다면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을 손봤다.

 

호주는 2017년 형법 개정을 통해 미성년자 온라인 보호법을 마련했다. 이 법은 전송 서비스를 통해 16세 미만의 아동에게 해를 입히거나, 성행위를 시도하거나 계획하는 행위 등을 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아울러 아동성범죄와 아동 성 착취 영상, 아동이 피해를 볼 수 있는 행위 등과 관련된 통신 매체는 차단하거나 접근을 제한하는 규정도 마련했다. 지난해에는 호주 밖에 거주하는 아동과의 성관계 및 기타 성행위에 관여하거나, 해외에서 성적 목적으로 아동을 그루밍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도 강화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6세 미만이라고 합리적으로 의심했어야 하는 사람과 음란한 행동을 하려는 의도 등을 갖고 통신 서비스 또는 컴퓨터화된 작업을 이용해 만남을 시도했다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이 규정은 컴퓨터와 원거리 송수신기 등을 이용한 채팅방·채팅 서비스·게임에 모두 적용된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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