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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대군 격돌을 무대에서 판소리로 되살린 ‘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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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2-23 15:00:00 수정 : 2020-02-23 13: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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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영웅들의 이야기를 칼군무와 힘있는 라이브 밴드 연주, 판소리 합창으로 무대에 올린 판소리 극 ‘적벽’. 정동극장 제공

지금 서울 공연장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가 넘치는 무대라면 단연 정동극장의 ‘적벽’을 꼽을만하다. 스물한명의 젊은 배우와 다섯 악사가 90분 동안 만들어내는 무대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흥미롭고 박진감 넘친다. 발목 보호대를 찬 맨발 차림으로 장수가 되어 전장(戰場)이 된 무대를 질풍처럼 누비는 배우들에게선 거센 기세가 넘쳐난다.   

‘적벽’은 2017년 초연 때부터 ‘회전문 관람객’을 양산하며 확실한 인기 공연으로 자리잡은 작품이다. 판소리 ‘적벽가’를 뼈대삼아 김봉순 탄츠비 현대무용단 대표의 현대적 안무와 이경섭 엮음소리 대표의 음악을 더한 무대가 일품이다. 고수 북소리에 장단 맞춰 소리꾼 혼자 이끌어가던 무대가 해설 역할을 맡는 도창과 유비·관우·장비와 조조, 공명, 주유, 조자룡 등 삼국지 주요 인물은 물론 전장에 끌려온 병사들의 입체적 이야기로 꽉 채워진다. 무대는 후면 상층부와 이곳으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양옆에 설치된 게 전부이나 조명·영상과 함께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현장감이 넘쳐난다. 장비가 장팔사모 하나로 적 대부대를 홀로 막아내고, 조자룡이 유비의 갓 난 아들을 품에 안고 적진을 돌파하는 장면이 넉넉하게 만들어진다. ‘적벽’의 자랑인 흰색, 붉은색 부채들은 전장 속 병사들의 창과 방패가 되었다가 다시 조조 대군을 불태우는 동남풍에 번지는 불길이 된다.

“한나라 말엽 위, 한, 오 삼국 시절에”라고 외치는 출연진 합창으로 시작하는 극은 ‘도원결의’ ‘삼고초려’ ‘장판파 전투’ ‘적벽대전’ 등 삼국지 주요 장면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창의적인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데 오나라 장수 서성과 정봉이 주유의 명령으로 말을 타고 장강을 흘러가는 공명을 추격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또 이번 네 번째 공연에선 정호붕 연출이 ‘미부인의 결행’을 추가해서 조자룡 활약을 크게 부각했다. 

숨 가쁘게 진행되던 극은 적벽대전 후 살길을 찾아 나선 조조와 패잔병들의 이야기인 군사점고, 새타령, 군사설움 대목에서 깊이가 더해진다. 세상을 굽어보며 오만하던 조조는 무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병사들의 한탄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영웅 중심의 단선적인 전개에서 벗어나 끊임없는 전쟁에 죽어나는 민초들의 애환과 설움을 풍자와 함께 전하던 판소리 정신이 이어진 대목이다. 특히 이번 공연에선 군사설움 대목에서 거문고 병창을 추가해 패잔병들의 설움과 애환을 보다 애처로운 노래로 전한다.

‘적벽’의 흠을 찾자면 삼국지에 친숙하지 않은 세대에겐 불친절한 공연일 수 있다. 판소리 원전을 살린 대사·가사는 한문·고어투여서 무대 왼편에 설치된 자막 화면을 보더라도 뜻풀이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공명 대 관우·장비, 공명 대 주유, 조조 대 관우의 대립 구도를 이해하면 ‘적벽’을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다. 주군 유비 아래 이인자 지위를 놓고 공명과 관우·장비 사이에 벌어진 기 싸움은 삼고초려때부터 시작돼 관우가 조조를 풀어준 후 공명의 처분을 기다리는 마지막 대목에서야 끝난다. 빠르게 진행되는 공연이지만 정호붕 연출은 이 대목을 빼놓지 않았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공명을 죽이려다 실패하는 주유는 훗날 공명의 계략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옛정을 구차하게 팔아 관우에게서 간신히 살길을 구한 조조가 다시 거만한 태도로 적진을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군령을 어긴 책임을 각오하고 조조를 풀어줄 수밖에 없는 관우의 선택도 동양 고전으로서 삼국지가 지닌 힘을 ‘적벽’이 고스란히 살려낸 대목이다.

‘재능있는 젊은 소리꾼이 참 많구나’라고 감탄하게 하는 ‘적벽’은 밴드 ‘이날치’의 멤버 소리꾼 안이호와 ‘판소리 오셀로’, 뮤지컬 ‘아랑가’로 꾸준히 관객과 만나온 소리꾼 박인혜가 새로 ‘조조’를 맡고 있다. 국악방송 ‘바투의 상사디야’ 진행자이자 판소리로 유쾌한 공연을 펼쳐오고 있는 바투컴퍼니의 소리꾼 이상화도 ‘장비’로 합류했다. 지난해 ‘정욱’을 연기했던 소리꾼 정지혜는 이번에는 도창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성별에 상관없이 배역을 맡는 ‘젠더프리’ 공연으로서 출연진 21명 중 11명이 여성인데 모두 제 옷을 입은 듯 전혀 어색함이 없다. 특히 지난 18일 공연에선 ‘간웅(奸雄)’의 참모습을 보여준 박인혜와 수많은 장수가 등장하는 삼국지에서도 손꼽히는 용장(勇將)이었던 자룡을 맡은 김하연, 극 중심에 선 공명 임지수의 열연이 돋보였다. 서울 정동극장에서 4월 5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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