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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해프닝 통해… 웃음과 교훈 던지다

입력 : 2020-01-29 21:02:46 수정 : 2020-01-31 10: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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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만화’의 대부 길창덕 작고 10주기 / 꺼벙이·재동이·돌석이·순악질 여사… / 친근한 캐릭터로 한국인의 웃음 코드 담아내 / 1970∼80년대 풍미… 중장년층엔 ‘문화 대통령’ / 기존 일본식 ‘우스개 만화’와 구별 독창적 화풍 / 90년대 日 만화 인기몰이하며 급속도로 퇴장 / 웹툰 시장 커지며 계보 잇는 작품 다수 등장

“… 극화시대가 열리면서 명랑만화는 1970년대의 상징이자 추억으로 잊혀졌고 길창덕의 시대 역시 저물었다. 그러나 과장의 미학, 명랑의 풍자정신은 정치적 현실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언제고 다시 돌아온다. 2012년 1월30일, 돌아가신 지 2주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가 벌써 기억되는 이유이다.”(만화평론가 박석환) 1970∼80년대 한국사회는 ‘고도화된 압축성장’으로 요약된다. 폭발적인 산업화로 도시 전체가 가난을 벗어나 풍요로움 언저리에 가닿는 동안 문화 소비에 대한 대중적 욕구 역시 크게 늘어났고, 또 다양해졌다. ‘길창덕(1930∼2010)’. 이 격동의 시기를 경험한 중장년층에겐 듣기만 해도 애틋해지는 이름이다. 길창덕은 그 시절 아이들에겐 ‘문화대통령’이나 다름없는, 가장 사랑받는 만화가였다.

 

요즘 세대에겐 다소 낯설 수 있으나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꺼벙이’와 ‘재동이’, ‘돌석이’, ‘만복이’, ‘쭉쟁이’, ‘덜렁이’, ‘딸딸이’는 옆집 살던 친구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명랑만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고 한국 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가 오늘(30일)로 작고 10주기를 맞는다.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춰 버린 명랑만화, 그리고 길창덕의 의미를 전문가들과 함께 살펴봤다.

◆“시대를 앞서간 명랑만화 개척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겁없이 시작한 거지요. 만화를 그리는 법도 모르면서….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요.”(길창덕 생전 인터뷰)

25살 길창덕의 등장은 지금으로선 보기 힘든 ‘파격’이었다. 1955년 서울신문 독자투고란을 통해 처음 이름을 알린 그는 그해 월간 ‘야담과 실화’를 시작으로 당대의 쟁쟁한 잡지에 줄줄이 작품을 실어 이목을 모았다. 김용환, 신동우, 김경언 등 ‘1급 작가’들이 있는데도 잡지사들이 무명의 길창덕을 먼저 찾았기 때문이다. 그가 별다른 스승 없이 독학으로 만화를 그렸다는 점은 놀라움을 더했다.

“길창덕표 만화의 등장은 충격이이었어요. 그냥 엄청 재밌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일제 영향을 받은 만문만화(흐트러진 글과 난삽한 그림)가 많았는데 뭐랄까, 재미가 하나도 없었죠.”

‘맹꽁이 서당’으로 유명한 원로 만화가 윤승운(77)의 설명이다. 길창덕 만화는 그 시절 통용되던 만화의 문법을 일거에 뒤집는 것이었다고 한다. 기존 일본식 ‘우스개 만화’와 구별되는 독창적인 화풍과 배꼽 잡는 유머, 개성 강한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이 남달랐다.

특히 은연중에 담기는 교훈적 메시지는 길창덕 작품의 백미였다. 그는 주로 초등학생 주인공들이 겪는 일상 속 해프닝을 잔잔한 방식으로 다루곤 했는데, 이는 ‘만화는 유해한 것’이란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윤 작가는 “만화가들을 한데 불러다 놓고 ‘교육적으로 그리라’고 으름장을 놓는 정부 관료에게 ‘만화는 만화’라고 따지던 게 길 선생님”이라면서도 “그럼에도 항상 교훈적인 메시지가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길창덕은 1966년 ‘재동이’ 연재를 시작으로 다수의 명랑만화를 내놓으며 70∼80년대 만화계를 주름잡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길창덕은 ‘꺼벙이’와 ‘재동이’로 대표되는 어린이 만화와 구별되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도 여럿 내놓았다. 여성중앙에 실은 ‘순악질 여사’(1970)가 대표적이다. 일자 눈썹에 남편을 쥐고 마구 흔드는 순악질 여사는 한국 만화사에선 보기 드물게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대를 한참 앞서간 셈이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저서 ‘길창덕’에서 “당시에는 ‘현대가 만들어낸 억척이’ 정도로 소비됐지만 기존 젠더 관념을 벗어나 스스로 상황을 주도하는, 시대의 흐름을 앞서 읽은 캐릭터”라고 평가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인기를 모은 길창덕식 명랑만화는 후배 작가들에 큰 영향을 미치며 1970∼80년대 국내 만화 흐름을 주도했다.

◆‘길창덕 코드’의 퇴장, 그리고 부활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랑만화는 1990년대 초반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로 대표되는 일본 만화의 수입 이후 극적인 퇴장을 맞는다. 깔끔한 펜선과 복잡하게 뒤엉킨 자극적인 서사를 앞세운 일본 만화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명랑만화가들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명랑만화를 배우겠다는 후배들도 사라졌다.

‘로봇찌빠’의 신문수(81) 작가가 “길창덕의 명맥이 끊겼다”며 크게 아쉬워하는 이유이다. “지금 길창덕의 영향을 받은 후배가 얼마나 있겠느냐”는 거다. 그는 “대학 만화학과 등 제도권에서 체계적으로 만화교육을 받게 된 것도 물론 좋지만 명랑만화는 학교에서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며 “모든 만화의 근간에 명랑만화의 코드가 있고 알면 알수록 비전이 있는 분야인데 이렇게 사라지는 듯해서 무척 안타깝다”고 말했다.

반면 길창덕의 정신, ‘길창덕 코드’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만화평론가 박석환(47)의 설명이다. “한때 명맥이 사라진 듯 보였지만 2000년대 들어 웹툰 시장이 커지고 장르적 다양성이 확대되면서 그 시절 명랑만화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다수 등장했습니다. ‘마음의 소리’로 대표되는 ‘병맛만화’가 우스개 코드를, ‘코믹 메이플스토리’로 대표되는 판타지 만화가 모험·탐험의 코드를, 다수의 아동 학습만화가 일상·교훈의 코드를 잇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모은 웹툰 ‘와라! 편의점’을 그린 지강민(41) 작가도 “길창덕의 ‘꺼벙이’는 어린 시절을 같이한 친구나 다름없고 만화가의 꿈을 키우는 데 크게 영향을 준 작품”이라며 “딱 ‘길창덕 코드를 이은 것’이라고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명랑만화는 2000년대 이후 ‘일상툰’으로 부활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 작가 등 12명의 청년작가들은 2010년 2월 릴레이 웹툰을 연재하며 길창덕을 추모했다.

길창덕은 이제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만화계에 남아 따뜻한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가 살아 있다면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웃음을 한껏 머금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예전에 만화판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성직자지 다른 게 성직이냐’며 껄껄 웃은 적이 있어요. 다른 사람보다 한두 시간 덜 자고, 조금 더 재밌게 그리자.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일, (만화를 그리는) 이것이야말로 성직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생전 인터뷰에서)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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