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대신 날계란
조금씩 썩는 그림
닭뼈·솔잎 퇴비로
비옥해진 흙밭
보존·축적 중심서
분해·소멸·순환으로
전시의 틀 깬 시도
서울관서 석 달간
국내외 작가 15인
50여 작품 선보여
무엇이든 좋으니 딱 한 점만 팔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할 때마다 이은재(37) 작가에게서 완곡한 거절의 대답이 돌아왔다. 계란 노른자로 그린 그림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을 비롯해 좋은 그림을 그리는 전도유망한 작가라 생각했기에 개인적으로 소장할 수 있기를 바라던 차였다.
이 작가는 그냥 거절하기 뭐했는지 이런저런 변을 뒤따라 보냈다. 만들어 놓은 작품 수가 많지 않아 앞으로 전시를 할 때 필요할 것 같다는 둥, 아직 실력이 모자라 팔 만한 그림이 못 된다는 둥…. 속사정이야 어떻든, 작가는 아직 그림을 팔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는 다른 거절의 대답을 내놨다. 그것은 그동안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림이 썩어서 못 팔아요.” 그림이 썩다니, 아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 작가의 말인즉슨, 그림은 계란 노른자로 그렸는데, 아무래도 계란으로 그렸으니 철따라 곰팡이가 슬기도 하고 갈라지거나 변색이 되기도 해서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삭는 작품, 삭는 미술’이었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충분히 수긍이 갔다. 어느 순간 현대 미술이 갖고 있는 모순이랄까, 현대 미술관과 미술시장이 통제하는 욕망의 실체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무리 예술적 가치, 상품 가치가 높다고 하더라도 썩기를 자처하는 생태주의적 작품은 미술관에 들어오기도, 시장에서 팔리기도 어렵다는. ‘삭는 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주연의 마음속으로 쿵, 하고 내려앉던 순간이었다.
분해와 변화, 순환의 개념을 담은 작품을 중심으로 현대 미술관의 보존 중심 제도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되묻는 국립현대미술관(MMCA)의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가 지난달 30일 개막해 5월3일까지 서울 종로 MMCA 서울관 제6·7전시실과 전시마당에서 열린다.
전시를 기획한 이 학예연구사는 “변화하는 물질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미술 제도를 이루는 관념 자체가 이제는 바뀔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전시가 시작됐다”며 “생산·소비·축적의 흐름에서 벗어나, 공유와 순환이 가능한 방식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장 입구의 왼쪽에선 전시의 문제의식을 던져준 이 작가의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이 관객을 맞고, 입구의 오른편에 들어서면 하얗게 정돈된 미술관 바닥 대신 비옥한 퇴비 같은 흙밭이 맞는다.
한 사람이 쇠스랑이나 삽으로 흙밭을 일구고 있는데,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사드 라자의 작품 ‘흡수’이다. 작가는 닭 뼈와 소나무 잎, 커피 찌꺼기, 택배 상자 등 서울에서 나온 부산물과 재료를 사용해 퇴비 흙을 만들었고, 관람객들은 흙을 밟고 지나가면서 원하는 만큼 흙을 가져갈 수도 있다.
전시는 이 작가의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과 아사드 라자의 ‘흡수’를 ‘서막’으로 해, 제1막 ‘되어가는 시간’, ‘막간’, 2막 ‘함께 만드는 풍경’ 등 모두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이 작가를 비롯해 고사리, 유코 모리, 아사드 라자 등 국내외 작가 15인(팀)의 회화, 설치 작품 등 50여 점을 선보인다.
제1막 ‘되어가는 시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삭아가는 작품으로 이루어진다. 그림이란 지질학적 시간 속에 끊임없이 변하는 안료가 잠시 머무르는 장소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이은경의 에그 템페라 ‘그글피’, 뜨개질로 만든 ‘향로’에 향을 피운 뒤 춤추는 연기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만드는 여다함의 ‘향연’, 좁아지는 통로 끝에 끝없는 동굴 같은 이미지로 대지와 하나되는 듯한 경험을 주는 델시 모렐로스의 ‘엘 오스쿠로 데 아바호’ 등.
특히 썩어가는 과일에서 비롯된 에너지로 빛을 밝히고 연주를 이어가는 ‘사건’을 형상화한 유코 모리의 ‘분해’가 인상적이다. 작품은 죽은 사람의 몸이 아홉 단계로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일본 전통 불화 ‘구상도’에서 출발했는데, 일본 스님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육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냈다고 한다. 존재의 필멸성을 환기하는 한편, 서로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에너지의 흐름과 순환을 감각하게 한다.
전환의 준비를 상징하는 ‘막간’은 서울관 건물의 중정에 풀을 뭉쳐 만든 고사리의 ‘초사람’과 흙을 다져 만든 김주리의 ‘물산’이 자리한다.
2막 ‘함께 만드는 풍경’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이 호흡하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풍경을 펼쳐 보여준다. 빛바랜 천과 항아리, 마른 꽃, 곤충과 곰팡이 등 비인간 공동체를 내세워 애도와 죽음을 재조명한 브라질 출신 댄 리의 작품 ‘목격자’, 자연과 공존해온 고대 마야인의 지혜를 전하는 동시에 작품 가치를 지속하고 공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에드가 칼렐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우뭇가사리 등 유기물 재료를 통해 ‘사회적 발효’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의 ‘채널링 하우스’ 등이 그것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동시대 환경 인식을 반영한 미술작품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 변화에 부응하는 급진적인 미술관의 모델을 상상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장을 빠져 나올 즈음, 우리들은 죽음이나 분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고 묻는 작품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상이나 실패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조건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비인간 공동체들과 공존하고 자연의 순환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미술관 역시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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