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하게 마주하기 힘든 사물과 주제
우리는 눈과 마음의 ‘흐린 눈’으로 봐
그의 풍경은 너무 가까워 풍경이 안 돼
삶 속 흐리게 남은 순간이 들어서게 돼
초점 없는 화면은 잃지 않으려는 선택
결국 해야 할 일은 끝까지 바라보는 것
삶을 가로지르는 문턱에서 절망을 맛볼 때, 희망이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저편으로 밀려날 때, 눈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까맣게 일렁이는 찻잔 속 물결, 붉게 타오르다가 속수무책으로 검게 번져가는 황혼의 하늘빛.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TV 화면 속 웃는 얼굴들과 푸드득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새의 무리, 바닥에 남아 있는 고양이의 검은 발자국. 갈 곳 잃은 마음을 따라 시선은 함께 멈춰 서거나, 반대로 응시할 것들을 숨 가쁘게 찾아낸다. 방황하는 눈은 무언가를 분명히 보는 대신 버텨낼 수 있도록 시야를 속절없이 흩트린다.
◆문턱에서 바라보기
윤혜진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거리를 조절하는 눈이 바라본 풍경을 그린다. 삶과 죽음, 상실과 고통처럼 불시에 등장하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선택적으로 ‘흐린 눈’을 취한다. 일종의 ‘자기 보호의 전략’으로서의 보기는,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공포 영화를 볼 때 궁금하지만 똑바로 보지는 못하고 비스듬히 바라보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또렷하게 들어오는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보는 눈은 마음속으로 그 장면이 더 이상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불투명한 막이 되어 우리를 지탱해 준다.
주로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어 구체적인 제목을 지니지만, 화면에 남아있는 것은 실체를 포착하려는 시도를 번번이 무너뜨리는 색면과 덩어리들이다. 할아버지가 입던 니트의 색과 패턴, 세상을 떠난 고양이가 사용하던 캣타워의 형상처럼, 떠나보낼 수 없지만 또렷하게 마주하기는 어려운 사물과 장면이 주제가 된다. 분명하게 마주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 흐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들. 눈의 시야와 마음의 시야가 어긋난다. 눈으로는 볼 수 없어 거리를 두지만, 마음은 달아나지 못하게 붙잡는다. 윤혜진의 희뿌연 화면은 멀어진 눈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너무 가까워져 흐릿해진 장면이기도 하다.
별관(마포구 망원동)에서 2025년 12월 12일부터 1월 10일까지 진행되는 개인전 ‘눈과 벽’은 그동안 윤혜진이 유지해 온 자기방어적 보기가 더 이상 안전한 거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이전에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시야를 조절하는 전략이 중심에 있었다면, 이번 전시는 삶의 고통이 불쑥 하나의 벽처럼 눈앞에 다가온 순간-흐리게 보는 행위조차 더 이상 거리를 확보해주지 않는 상황-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이곳에서 벽은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되기보다, 피할 수도, 돌아설 수도 없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마비시키는 조건이다. 세계의 질서 앞에서 무력해질 때, 다시 말해 삶이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순간에 작가는 “우산도, 비를 피할 곳도 없이 고작 하나의 몸으로 하늘의 구멍을 받아낸다.” 힘겹게 붙들고 있던 희망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가고,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어 텅 빈 손으로 하늘을 노려보던 시선은 이내 감당하기를 택한다. 추모도, 위안도, 기억을 저장하기 위한 것도 아닌 응시. 그것은 실재와 부재 사이의 문턱으로 들어가, 존재가-그것이 자신이든 떠난 존재든-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여전히 온몸으로 비와 바람을 맞고 있지만, 도피나 회피가 아닌 흐릿하게 보는 방식으로 세계를 견뎌낸다.
◆풍경이 되지 못한 풍경
또렷하게 포착하기를 거부한 응시 속에서, 윤혜진의 ‘풍경’은 기존의 풍경화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된다. 전통적 풍경화가 관조적 시점과 세상과의 거리를 전제로 해왔다면, 윤혜진의 풍경에는 거리도, 조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풍경이 되지 못한 상태에 가깝다. ‘등, 뒷모습, 먼 곳’에서는 비선형적 시점과 뒤섞인 관점에서 관찰된 잔상들이 포개져 나타나고, ‘거실’에서는 색의 덩어리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분명히 색을 발하지만 흐릿한 형상들은 사건의 전과 후를 동시에 품은 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보다는 서서히 스며든다. 빛 이전과 이후의 모습처럼, 혹은 물속에 퍼지는 잉크처럼, 화면은 언제나 진행 중인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윤혜진의 풍경은 하나의 시점이라기보다 과정이며, 장면이라기보다는 사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통과한 이후에 남아 있는 감각적 잔여로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몸을 압도하는 경험이 된다.
‘인기척과 인사, 그리고 영원에 대하여’에서는 형태 이전의 감각이 화면에 머물도록 시도한다. 인기척에는 모양이 없다. 인사에 담긴 마음의 온도, 영원 또한 그러하다. 작가는 무형의 기류를 흐릿하고 불명확한 형태로 붙잡고, 추상적 형상들은 이름 없는 상태로 화면 위에 부유한다. 내러티브는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개인의 이야기는 너무 쉽게 위로되고 소비되기 때문이다. 흐릿한 형상들은 타인의 경험을 섣불리 규정하지 않도록 거리를 지켜주는 동시에, 관객이 자신의 삶 속에 흐리게 남아 있는 순간을 대입해 볼 수 있는 여백을 열어둔다. 이곳에서 차오르던 감정들은 침착하게 가라앉고, 기억은 과거에 봉인되지 않은 채 현재에 머물게 된다.
◆사라짐 이후의 시간을 위하여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윤혜진의 흐릿한 풍경은 끝내 놓지 않으려는 마음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잔상이라기보다 잔광에 가깝다. 그것은 감각의 끝에 남은 이미지, 곧 현상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라짐 이후에도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의지가 투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초점 없는 화면은 따라서 실패한 인식이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선택의 결과다.
날카롭게 침투하지 않고 아릿하게 퍼져 나가는 표면의 기류는 작가가 취하는 태도의 밀도이기도 하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도망치거나 뾰족한 날을 세우지 않고, 떠나간 것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머무르기를 택하는 일. 눈을 감아버리는 편이 쉬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흐릿한 상태로 불투명한 세계와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눈 돌리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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