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사조·역사 등 입체적으로 풀어내
서민들의 일상 담은 풍속화 집중 조명
‘이동전람회파’ 불리던 인텔리겐차 화가
기득권 가득한 현실 등 사실적으로 담아
러 미술사 바꾼 ‘3대 작품’ 소개도 눈길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 김희은/ 자유문고/ 2만5800원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 등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미술은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문학만큼이나 깊고 격정적인 정서를 품고 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낯설다. 국내에선 서유럽 미술사 중심의 교육 구조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그간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데다 실제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에서 딱딱한 정치 그림을 떠올린다. 여기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라는 이름 앞에 ‘침략국’ 이미지가 더해진 상황이라 러시아 미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소개와 더불어 애호가를 갖기 어렵다.
러시아 미술 전문가인 저자가 펴낸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는 그간 접하기 어려운 러시아 회화의 역사·사조·화가·작품을 입체적으로 풀어낸 러시아 미술 탐험서라 할 수 있다. 서구 중심의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러시아 작가들을 집중 조명해 국내에 소개한 미술 서적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저자가 먼저 많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는 그림은 농민과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다. 서유럽 미술의 주류가 오랫동안 신화·영웅·귀족 초상에 머물러 있을 때, 러시아 화가들은 가난한 농민과 서민의 삶을 화폭 한가운데로 끌어올렸다. 이 그림들은 현실을 단순 재현한 풍속화가 아니다. 그 속에는 풍자와 해학, 연민이 담겨 있다. 풍속화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바실리 푸키레프(1832~1890)의 ‘불평등한 결혼식’이 꼽힌다. 결혼이 돈에 의해 거래되는 19세기 러시아의 비극적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는 벗겨져 하얀 머리카락만 조금 남아 있는 한 늙은 남자가 금방 피어난 한 떨기 꽃 같은 어여쁘고 젊은 여인의 옆에 서서 결혼 촛불을 밝히고 있다. 행복과 웃음이 가득해야 할 신부의 표정은 그야말로 수심이 가득하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듯한 신부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바닥을 헤맨다. 그런 신부를 힐끔거리는 늙은 신랑은 당연히 돈 많은 귀족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된 경제적 불평등과 이로 인한 사회적 민낯을 제대로 풍자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러시아 리얼리즘의 최고봉으로 꼽는 화가는 일리야 레핀(1844∼1873).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이다. 이 작품은 그림 대한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보더라도, 절망과 슬픔이 배어 있다.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젊은 남자와 그를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절망에 빠진 나이 먹은 남자가 나온다. 나이 먹은 남자가 아버지이고, 죽어가는 젊은 남자가 그 아들이며, 아버지가 아들을 창으로 찔러 죽인 상황이다. 극악무도한 패륜이다. 사실 아버지는 러시아의 폭군 황제 이반 뇌제이며, 죽은 이는 아들이자 왕자였다. 극도의 공포 정치를 펼친 이반 뇌제는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든지 단칼에 처단했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임신한 며느리조차도 차림이 단정치 못하다며 몽둥이로 때려 유산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런 그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아연실색이다. 광기와 온정신 사이의 간격은 그야말로 찰나이다. 광기에 휩싸여 창을 휘둘렀지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아들을 죽인 것이다. 얼굴에는 생기 하나 없는 허무만이 가득하고, 믿기지 않는 일로 놀라 부릅뜬 눈동자,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지옥 그 자체이다.
‘이동파(이동전람회파)’로 불리는 러시아 인텔리겐차 화가들도 눈에 띈다. 이반 크람스코이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그룹은 1871년부터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순회 전시를 열었다. 왕실과 아카데미가 독점해온 미술을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기득권의 부패와 현실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저자는 “이들의 활동은 러시아 미술계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이며 그림의 소재뿐 아니라 향유 계층까지 민중이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세계 미술사에서도 드문 ‘예술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의 ‘간송’이라 불릴 만한 파벨 트레차코프와 미술관의 탄생 과정도 흥미롭다. 대부호였던 파벨 트레차코프는 이동파와 리얼리즘 화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매입하며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자신의 집을 개방해 누구나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토대로 러시아 최초의 공공 미술관인 ‘트레차코프 미술관’이 탄생했다.
책 후반에서 저자는 러시아 미술사를 바꾼 ‘3대 작품’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 레핀이 “러시아 미술사상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고 극찬했을 만큼, 종교적 장면에 러시아 민중의 얼굴과 감정을 담아낸 걸작이다. 두 번째는 미하일 브루벨의 ‘앉아 있는 악마’. 러시아 최초의 상징주의자로 평가받는 브루벨은 이 작품을 통해 러시아 모더니즘의 길을 열었다. 그의 ‘악마’는 실패와 고독, 시대의 불안을 압축한 존재다. 세 번째는 추상미술의 선구자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현실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던 회화와 결별하고, 무엇과도 닮지 않은 순수한 형상, 순수한 창작물 자체를 화면에 올려놓은 작품으로 극찬을 받고 있다. 저자는 이 작품들 외에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소피아 공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 ‘삶은 어디에나’ 등 러시아사를 관통하는 대표작을 하나씩 세밀히 짚고 있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러시아 미술을 단순한 회화사의 흐름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년 넘게 러시아에 살며 트레차코프 미술관과 푸시킨 박물관에서 도슨트로 활약한 저자는 그림 속 등장 인물의 표정, 화면 구도의 세부 요소, 작가가 남긴 기록, 동시대 비평가의 논쟁까지 함께 엮어내, 러시아 사회의 환경과 민중의 감정 구조까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한다. 책장을 덮을 때 즈음에는 러시아 회화는 더는 낯선 타자가 아니라, 흥미로운 인문적 세계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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