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랜드마크 ‘경주타워’
1400년 전 80m 높이 목탑
건립 의미 현대적 재해석
윤곽을 음각으로 처리해
탑의 부재로 존재감 부각
철강으로 만든 ‘중도타워’
동국 회장이 사재로 설립
강국에 굴하지 않는 기개
이웃국 손잡은 실용정신
에이펙에서도 발휘되길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경주는 한때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였다. 당시 경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압도적인 높이의 탑 하나에 시선을 멈춘다.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는 225척이었다고 한다(“?盤已上?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당시 통용됐던 고구려척(1척=35.6㎝)을 적용해 보면 대략 80m로 아파트 30층 정도의 높이다. 믿기지 않는 높이이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가로, 세로 각 3m 크기의 심초석(心礎石: 가장 중앙에 배치되는 디딤돌)과 적심 시설(건물 기초를 다지는 시설)의 규모를 통해 추정한 높이도 대략 그 정도라고 한다.
높은 건물이 없는 고대도시 경주에 시각적 강렬함을 주었기 때문인지, 1400년 전에 80m에 달하는 구조물을 세운 기술력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현존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 때문인지 황룡사 9층 목탑은 건축가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였을까? 현재 경주에는 소실된 황룡사 9층 목탑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되살린 두 개의 타워가 세워져 있다.
첫 번째 타워는 2007년 제4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랜드마크를 의도하며 건립된 ‘경주타워’다.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라는 내용이 현상설계 지침에 포함돼 있을 만큼 경주타워는 그 시작부터 황룡사 9층 목탑과 연계돼 있었다. 유리로 된 직육면체 건물에 목탑의 윤곽을 음각(Negative Space)한 경주타워는 목탑의 부재(不在)를 통해 그 존재감(實在)을 강조한다. 준공 후 13년이 지난 2020년에 법원 판결을 통해 비로소 원설계자로 인정받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은 빈 공간을 통해 신라건축문화의 상징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타워는 경주타워와 5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중도타워다. 2016년 장상건 동국산업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재단법인 중도에서 지었다. 타워의 외관은 목재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동국산업의 주 생산품인 철강이다. 중도타워는 경주타워와는 반대로 황룡사 9층 목탑의 형태(Positive Space)가 재현돼 있다. 두 타워는 경주시장의 주례로 ‘건물 혼례식’을 올리기도 했는데, 물론 두 타워에게 혼인 의사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은 당시 신라가 처했던 상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라인들의 대처를 보여준다. 가장 먼저 탑의 건립을 제안한 자장율사를 비롯한 신라 지도부의 외교적 안목이다.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신라로 귀국하던 자장은 태화지(太和池: 현 산시성 타이위안시로 추정)에서 신인(神人)을 만난다. 신인은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물었고 자장은 신라를 향한 말갈, 왜국, 고구려, 백제의 위협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신인이 내린 처방은 황룡사 안에 9층 탑을 만들고 팔관회(제천의식)를 베풀며, 죄인을 사면하라는 것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으니 직접적인 위협으로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하지만 거리가 떨어진 말갈과 왜국을 실질적 위협으로 언급했다는 건 자장이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정보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황룡사 9층 목탑은 자장이 언급한 네 국가 외 중화(당나라), 오월(중국 남부지역 세력), 예맥(고조선의 후예), 탁라와 탐모라(제주도)를 포함한 아홉 국가의 위협을 부처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다음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드는 책임자(工匠)를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 아비지(阿非知)에게 맡기는 유연함과 실용 정신이다. 비록 김용춘(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아버지)이 사업을 주관했으나, 핵심 기술자는 적국이었던 백제의 장인을 초빙했다. 당시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침공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결정이었다. 이는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기술 수준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국가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 최적의 선택을 할 줄 알았다는 얘기다.
마지막은 탑의 건립을 결정한 ‘화백(和白)’의 의미다. 643년 자장으로부터 목탑 건립 제안을 받은 선덕여왕은 신하들과 논의를 시작한다. 이때 목탑을 건립하고 백제인에게 건립 책임자를 맡기자는 결정을 내린 주체는, 바로 건국 6부의 귀족 대표(대등)로 구성된 화백회의였다. 부족 연맹에서 시작된 신라의 권력구조를 보여주는 화백은 법흥왕이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공식화됐다. 그는 화백의 대표에게 ‘상대등(上大等)’이라는 관직을 내리면서 건국 귀족을 끌어안고자 했다. 화백의 의사 결정 방식은 여섯 대등의 ‘만장일치’였다. 화백은 공동체의 합의를 중시하고 신라의 집단지성을 상징하는 시스템이지만 신라 말기에는 일부 귀족들의 이익만을 대변함으로써 왕권을 약화하는 원인이 됐다.
화백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만장일치 방식으로 결정했다는 건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를 앞둔 우리에게 묘한 평행이론을 느끼게 한다. 1989년에 창설된 에이펙은 21개 가입국을 ‘국가(country)’가 아닌 ‘경제체(economy)’로 간주한다. 에이펙에서 회원 경제체 간에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도 ‘만장일치(Consensus)’이다. 합의문의 형태 역시 ‘결의문(Decision)’이 아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공동선언문(Declarations)’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에이펙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집단적 압력(Peer pressure)을 통한 회원 경제체의 자발적인 이행과 연성 규범의 힘이 있다고 평가된다.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한 뒤 처음 참석하는 다자 국제 정상회의다. 그래서 전 세계가 미·중 패권 경쟁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주목하고 있다. 또한, 회원 경제체는 아니지만 북한이 어떤 장면에서 등장할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회원 경제체들이 에이펙의 만장일치 정신보다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양자 협상을 우선시함으로써 공동선언의 결정을 지연하거나 심지어는 무력화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우리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 그리고 미일·중러 간의 격화된 신냉전대결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백의 만장일치 방식이 띠고 있는 다양성 존중이나 공동체 의식과 함께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당시 신라인들이 보여주었던 외교적 안목과 정보력, 유연함과 실용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황룡사 9층 목탑이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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