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가담 거부에 빚 상환 강요
“공범들 협박… 피해 회복도 외면”
법무장관 “독립몰수제 도입해
초국가적 범죄 대응해야” 주장
유죄 판결 전 몰수 위헌 지적도
“공범들을 협박해 범행에 가담시키고, 처음부터 피해자 A씨가 캄보디아 현지 범죄조직에 의해 상당 기간 감금되리라는 사정을 알면서 피해자를 국외로 이송하는 등 범행에 가담한 정도가 매우 중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재판장 엄기표)는 22일 지인을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에 넘긴 혐의로 구속기소된 주범 신모씨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하면서 이같이 지적했다. 재판부는 “범행을 조직적으로 분담해 수행하는 등 범행 방법과 내용, 감금 기간 등에 비춰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지적했다.

신씨는 국내에서 대포계좌를 모집해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한 보이스피싱 범죄단체 조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신씨는 지난해 11월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박모씨와 김모씨에게 수입차 사기 범행을 제안했다. 박씨는 이를 수락한 뒤 김씨의 음식점에서 일하던 피해자 A씨에게 범행을 대신 시켰다. A씨가 이를 거부하며 실행에 옮기지 않자, 신씨는 이 때문에 6500만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박씨와 김씨에게 채무 상환을 강요했다. 이어 신씨는 채무 전액을 탕감해주는 조건으로 박씨에게 A씨를 캄보디아로 보낼 것을, 김씨에게는 A씨와 함께 출국해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박씨는 A씨에게 “네가 약속한 시간에 수입차량 매장에 가지 않아, 6500만원을 손해 보는 상황이 생겼으니 네가 절반을 갚아야 한다. 캄보디아 관광사업을 추진 중인데, 고급호텔에 2주 동안 머무르며 사업 관련 계약서를 받아오면 채무 3000만원을 탕감해주겠다”고 제안했다. A씨가 주저하자 박씨는 “넌 캄보디아에 가야 한다. 그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냐”며 재차 요구했다.
결국 A씨는 올 1월13일 김씨와 함께 캄보디아로 출국했고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 인근의 범죄단지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 여권 등을 빼앗긴 채 구금됐다가 2월5일 구출됐다.
재판부는 “만일 피해자가 제때 구출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감금당했을지, 어느 정도의 추가적인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피고인들은 피해 회복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제2·제3의 캄보디아 사태를 막고 아동 성착취물 범죄 등 국경을 초월해 벌어지는 초국가적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독립몰수제는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행 제도에선 유죄 판결이 있어야만 범죄수익 환수와 피해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수사를 통해 범죄수익이 특정되더라도 범죄자가 확인되지 않거나 해외로 도피해 기소할 수 없는 경우 신속한 범죄수익 몰수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 부장검사는 “미국에선 수사 초기 단계에서 범죄 연관성이 의심되는 자산은 선제적으로 동결시켜 처분을 막고, 범죄자들에게 해당 자산이 범죄와 무관한 재산이란 것을 소명하도록 요구한다”고 말했다.
다만 유죄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 범죄수익을 몰수하는 제도는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하고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법원 판결에서 무죄로 결과가 뒤집힌다면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과 어긋나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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