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센터 개관 30주년 특별 기획
미술관 건물 전체를 작품으로 탈바꿈
낡은 천막·녹슨 고철에 생장하는 식물
대비되는 모습서 해체·변이·계승 표현
전시기간 내내 매번 달라진 모습 선봬
작품 의도 관객 스스로 탐구토록 유도
인간 역사, 끝없는 타자와의 경쟁·협력
적군의 언어 이해해야 생존할 수 있어
인류가 멸종된 어느 미래, 모래로 뒤덮인 바닥에 고철이 된 로봇이 나뒹군다. 콘크리트 골조와 배선이 그대로 드러난 건물의 천장에는 기괴한 모습의 식물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세계 멸망 이후)를 다룬 공상과학(SF) 영화 속 장면들을 미술관으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미술관 건물을 하나의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최대한 원래 상태를 보존해 작품 의도를 전달하려는 기존 전시의 개념을 버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 다양한 존재들이 뒤섞여 해체와 변이가 일어나는 공간을 만들었다. 미술 내부와 외부, 인간과 기계, 제도적 공간과 지구 생태계 사이의 경계를 인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다.
1층 전시장의 주출입구는 아예 흙더미로 봉쇄했고, 미술관의 상징 같은 흰 가벽과 조명도 뜯어냈다. 온·습도 조절장치를 꺼두고 흙, 불, 식물 등 자연요소를 내부로 들여왔다. 꽉 막힌 출입구 대신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통해 입장하면 텅 빈 강당의 좌석들을 투명한 비닐이 뒤덮고 있다. 외계인의 침공인지, 핵폭발인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끝을 맞이하면서 제대로 정리를 하지 않고 떠난 인류의 흔적을 상상하게 한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가 첫 전시 ‘싹’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아르헨티나·페루 작가인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개인전 ‘적군의 언어’를 개최한다. 아트선재센터는 1995년 한옥과 양옥이 함께 있던 미술관 옛터에서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생소했던 장소 특정 전시 ‘싹’을 선보였다. 경계를 뛰어넘는 아트선재센터의 도전정신을 이어받은 로하스는 수개월간 건물 도면을 토대로 작품 설치 환경을 구상했다.
아트선재센터 측과 아이디어를 공유한 뒤 작가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스튜디오 멤버 11명이 6주간 현장에서 전시를 제작해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건물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복도와 계단부터 강당, 화장실, 비상구 조명까지 건물 공간을 총동원해 분해와 변이, 계승이 일어나는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냈다.

관객은 작가의 정해진 의도를 맞닥뜨리는 대신 변화하는 인류와 자연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전시된 낡은 천막은 조금씩 바스러지고 고철에는 녹이 슬지만, 천장에 매달린 식물의 일부는 매일 생장을 거듭한다. 전시기간 내내 작품은 매번 달라진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하는 셈이다.
작가는 “인간이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작용해 현실을 만들고, 그 형식이 다시 물질을 창조해낸다”고 설명한다. 작가가 연출한 불안정하고 야생적인 공간에는 작품의 라벨이나 소개도 마련돼 있지 않다. 관객의 시선을 전제하지 않고, 작품의 공간으로 침투해 원초적인 감정과 시선을 고스란히 즐겨주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됐다.
작가는 집단적 협업을 통한 대규모 장소 특정 설치작업을 꾸준하게 진행해 왔다. 조각부터 드로잉,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인류를 포함한 자연 속 존재들의 경계를 탐구하는 내용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LA 현대미술관,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제12·13회 광주 비엔날레와 파리 피노 컬렉션(2024) 등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로하스의 작업은 자신이 직접 개발한 ‘타임 엔진’에서 출발한다. ‘타임 엔진’은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AI), 가상현실을 결합한 일종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다. 이곳에서 모델링을 거친 특정 시점의 디지털 생태계를 만든 뒤 다시 실물로 옮겨오는 방식을 쓴다. 작가는 디지털 공간 속 가상조각을 다운로드한 뒤 현실의 작업실에서 금속, 콘크리트, 플라스틱, 흙, 유리, 수지, 소금, 나무껍질, 자동차 부품 등 유기적·무기적 재료를 복합적으로 이용해 ‘타임 엔진’ 속 모습을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방치된 폐공장 등에서 찾아낸 다양한 재료들은 인간과 기계의 노동 흔적이 묻어난다.
이번 전시 제목인 ‘적군의 언어’는 곧 인간의 역사를 의미한다. 호모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 데르소바인 등 타자와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며 생존했다. 작가는 스페인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써왔고, 2014년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진행된 리얼 DMZ 프로젝트에 참가해 한국의 분단 현실을 체감하며 적과의 공존을 깊게 바라보게 됐다고 한다.
“적이라는 타자성은 낯설고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한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를 가진 새로운 타자, AI와 마주하고 있죠. 우리는 이미 그들과 공존하고 있고, 그들에게 지식을 전송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행위가 스스로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피할 수가 없네요.”
전시는 내년 2월1일까지 열린다. 월요일 휴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