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 넘어 인류 교류 가능케한 ‘문자’
문명 기반으로 도시 탄생에 이바지
송도센트럴파크·국제단지 품은 박물관
도시와 자연·미래와 전통 ‘연결’ 강조
둔덕길 따라 걸으면 흰 곡선 벽 만나
‘문자로의 위대한 여정’ 인도하는 듯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외국 건축가가 한글로 된 보고서를 보며 “한글은 참 기하학적으로 생겼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가 건축가라서 한글의 형태를 관심 있게 관찰했던 것 같다. 그때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전통 창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형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답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사용 방법이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어찌 됐든 한글이 기하학적으로 생겼다는 친구의 말은 이후 다른 나라의 글자를 볼 때마다 그 생김새를 유심히 관찰하는 계기가 됐다.
다른 나라의 글자들을 보면 상당수가 정자(正字)보다 흘린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파벳을 도입하지 않고 고대에 만들어진 글자를 사용해 온 언어일수록 더욱 그렇다. 아주 오래전 문자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흘린 선으로 이루어진 생김새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문자를 쓴다는 생각보다는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직선과 동그라미보다는 자유로운 곡선으로 구성된 그림이 더 편했을 듯하다.

인류는 언어의 휘발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 문자를 통해 인류는 같은 시공간에 있지 않은 사람과도 비교적 덜 변형된 정보와 지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체화된 지식(암묵지; 暗默知)이 문서나 매뉴얼처럼 형식을 갖추어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지식(형식지; 形式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문자를 통한 정보의 전달은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 발전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특히 공간의 한계를 넘어 지식과 정보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문자를 기록하는 매체가 휴대하기 편하고 이동하기 쉬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와 한지의 등장, 인쇄술과 제본술의 발전은 문자의 힘을 배증시키는 사건이었다.
2년 전 인천 연수구에 준공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건축물의 초기 스케치를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디자인을 주도했던 건축가가 직감적이고 자유롭게 그은 곡선이 박물관이 지어질 부지 위에 그려져 있었는데, 뭔가 앞서 설명한 고대 문자의 흔적이나 파피루스 두루마리 같아 보였다. 디자인팀은 내게 이런 형태를 현상설계 심사위원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Storyline)으로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내가 소속돼 있었던 회사가 12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자로 선정돼 이 건축물의 설계를 맡았다.

스토리라인을 짜기 위해 지도를 들여다보다 부지를 둘러싼 흥미로운 대비를 발견했다. 구체적으로 박물관 북동쪽에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도시조직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 설계회사 KPF가 미래 지향적인 도시 모델을 구현하기 위해 디자인한 국제업무단지의 배후 주거지이다. 반면, 반대편에는 간척지에 인공적으로 만든 송도센트럴파크가 자리하고 있다. 송도센트럴파크의 콘셉트는 주변 도시조직과 다른 전통성과 한국성이었다(연재 38화 참고).
이렇게 계획된 신도시 속의 ‘도시와 자연’, ‘미래와 전통’,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경계에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었기 때문에 건축물은 이 두 영역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이야기로 풀어보면, 해독하기 힘든 자연의 질서가 문자를 통해 인류의 지식으로 바뀌고, 전통이 문자를 통해 미래의 문명으로 발전한다는 구성이다. 최종적으로 삼우설계는 “공원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과 풍경을 끊임없이 기록하게 될 ‘PAGES’”를 설계 개념으로 제안했다.
실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공원의 지형처럼 자연스러운 둔덕을 이루고 있다. 공원 이용자들은 굳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박물관 위를 걸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 중간에 조형물 같은 곡선의 흰 벽과도 마주한다. 그 벽을 따라 걷다 벽이 둥글게 말린 공간에 놓인 전시물을 관람하거나 미로에서 길을 찾듯이 그사이를 산책한다. 수평으로 중첩되는 곡선 흰 벽 뒤로는 주변의 고층 건물이 솟아올라 있는데, 이 장면은 마치 문자가 쓰일 파피루스나 한지 두루마리가 도시 속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상상력을 조금 더 보태면 챗GPT의 답변이 프롬프트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듯이, 펼쳐진 곡선 흰 벽에 쓰일 내용에 따라 건축물과 도시의 모습이 바뀔 것 같다. 벽은 건물 안으로도 이어지는데, 상설전시장에서는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에 맞춰 전시 벽이 되어 관람객들을 안내한다.
하버드대 도시경제학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자신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 했다. 문자가 문명의 기반이었다면, 도시는 문자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8년 전 설계안의 스토리라인을 만들 당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세계문자박물관과 송도국제도시 간의 관계를 이 장면이 설명해 주었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문자는 이미지에 많은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는 책과 글보다 영상이나 사진을 통한 사유를 더 편하게 여긴다. 누군가는 ‘종이책의 종말’, ‘텍스트의 사망’을 선언했고 또 누군가는 미래의 언어능력을 문자가 이미지와 합쳐진 ‘상형문자적 능력’이나 소리와 하나 된 ‘의성문자적 능력’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찾고 이를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디지털 리터러시; Digital Literacy)을 넘어 아날로그 형식의 문자를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여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궁극적으로 글로 생각을 쓸 수 있는 능력(문해력)이 주목받고 있다. 심지어 디지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MZ세대 사이에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활동을 힙한 트렌드로 받아들이는 ‘텍스트 힙(Text Hip)’, ‘라이팅 힙(Writing Hip)’이 퍼지고 있다. 디지털 과잉의 시대에도 문자의 힘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문자가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지역 간 교류를 가능케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문자에 특화된 국립박물관이 ‘국가 간의 교류’를 핵심 가치로 삼는 송도국제도시에 들어선 건 적절해 보인다. 동시에, 앞으로의 역할은 문자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 속에서도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의 본질적 가치를 일깨워 주는 ‘언어 인프라’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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