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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곧 그 사람이다’…붓보다 먼저 닦고 다스린 마음

입력 : 2025-08-25 21:00:00 수정 : 2025-08-25 20:08:21
대구=글·사진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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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여기인_畵如其人’ 개인전 여는 소산(小山) 박대성

있는 그대로의 자연 담은 간결한 먹빛
강렬한 필법으로 전통 새롭게 재해석
한국화 중 보기 힘든 압도적 스케일 자랑
2022년 美 LACMA서 한국인 첫 전시회

능수버들 일렁이는 연작 시리즈 ‘유류’
가로 3m 세로 7m 크기의 ‘폭포’ 등
10월 18일까지 대구 리안갤러리서 만나

신독(愼獨). 삼갈 신, 홀로 독.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감. 

 

‘대학’과 ‘중용’에 실려 있는 말이다. 혼자 있을 때에도 조심한다는 뜻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격 완성을 위해 수양하는 모습이다.

 

‘유류 1’. 박대성의 수묵은 생동감 있는 필선(筆線)으로 한국의 자연과 고유문화를 묘사한다. 오랜 시간 서체연구를 거듭한 작가 특유의 강렬한 선과 다채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역동적인 공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능수버들의 작가’ 소산(小山) 박대성(80)의 작품 앞에 서면 유독 ‘신독’이 떠오른다. 

 

한국이 원산지인 능수버들은 물을 저장하고 깨끗하게 하는 성질이 있어 냇가, 우물가에 많이 심었다. 어느 토질에서든 잘 적응해 뿌리를 내리고, 늘어진 가지가 멋스러워 공원이나 가로수, 풍치수로 심어 가꾼다. 나무 전체에서 여유로움, 유연함, 온유함, 꺾이지 않는 강인함, 끈기 등을 뿜어낸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편협하지 않고, 선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민족의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담는 것이 한국화라 생각하는 박대성은 항상 주변의 실재(實在) 풍경이나 사물을 보고 옮기는 것이 공부이자 스승이라고 여겨왔다. 이는 색채를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방색에 모든 우주의 색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선조들의 믿음을 따르는 그의 먹빛은 그래서 단순하면서도 간결하다.

 

박대성이 자신의 작품 ‘폭포’ 앞에서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재료와 강렬한 필법, 간단한 색채배합을 바탕으로 공간을 아우르는 대규모 스케일, 여러 시점(multiview)에서 바라본 구도가 함께 더해져 비로소 완성된다.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12m에 달하는 ‘코리아 판타지’(2022)와 11m에 가까운 ‘몽유도원도’(2011) 등 한국화 중에서는 보기 힘든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화도 서양화처럼 큰 작품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작가의 소신과 함께 먹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유류’는 작가가 2024년부터 준비해온 버드나무 연작시리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만월과 함께 생명력 넘치는 능수버들의 가지가 화면 전체에 일렁인다. 동양화의 붓은 섬세하다. 서양화의 붓과 다르다. ‘살아 있음’이 단번에 팍 느껴지는 그림이 완성되는 이유다.

 

박대성의 개인전이 10월18일까지 대구 리안갤러리에서 ‘화여기인_畵如其人’이란 문패를 달고 관객을 맞는다. ‘그림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박대성의 예술철학을 관객에게 날 것 그대로 드러내보이자는 뜻을 품었다. 

 

‘유류 2’
‘유류 4’
‘유류 7’

이번 전시에는 16점의 작품이 내걸렸다. 전시장 2층은 ‘유류’ 시리즈가 차지했고, 1층에서는 ‘폭포’와 ‘덕수궁’, ‘설경’ 등 작가 특유의 필선이 담긴 대작들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9m 높이 전시벽에 설치된 ‘폭포’가 압권이다. 가로(폭) 3m 세로 7m의 크기로 일반 전시공간에서는 쉽게 선보일 수 없지만 리안갤러리의 높은 층고 덕분에 유감없이 자태를 드러냈다. 두 개의 폭포가 세차게 내려오는 하단에 작가가 직접 고안한 한글체가 정갈하게 나열돼 있다.

 

‘아득한 절벽 위로 흘러내린 흰 빛 물결 천근 바윗돌 위로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리마저 맑은 칼이 돼 가슴을 파고드네 신선은 이 물가에 발을 씻고 쉬었다고 나그네는 저 소리에 근심 씻고 눈을 감네 한줄기 물줄기도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네 … 그 물소리 속에 나는 내 마음을 보았네 천길 벼랑 타고 내려오는 저 물기둥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이라 불러도 되리니 푸른 이끼 낀 바위조차 그윽하네’

 

도필(刀筆), 칼로 새기듯 쓴 글씨다.

 

“하늘님보다 세종대왕을 더 존경한다”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앞으로 내 작품엔 한글만 쓰겠다”고 선언했다.

 

나날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과는 반대로 박대성의 작품세계는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며 관객들과 조우한다. 하루하루 정진하며 전통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과정을 굳건하게 견지하는 작가의 신념이 이곳저곳에 깔려있다.

 

‘고미’

앞서 그는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한국인 최초로 ‘고결한 먹과 현대적 붓(Park Dae Sung: Virtuous Ink and Contemporary Brush)’이란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LACMA는 현대작품을 포함해 아시아, 유럽, 북·남미의 다양한 유물 13만여점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 서부 최대 미술관이다. 두 달간의 전시회는 이후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학교 후드미술관,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찰스왕센터 및 메리 워싱턴대학교 등 총 8곳의 순회전으로 이어졌다. 한국화의 새 지평을 조망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는 평가와 함께 다트머스대학교 주도로 발간된 전시도록은 한국화 작가를 미술사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영문 연구서라는 미술사적 의미를 남겼다.

 

“줄곧 그림만 그리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마칠 것 같다”고 말하는 작가는 자신의 작업일지에 이렇게 썼다.

 

‘마음을 닦고 다스리는 것이 먼저고, 맑고 부끄러움 없는 삶의 태도가 먼저다. 자비로움과 자유로움, 거리낄 것 없는 삶의 태도를 100% 실천하느냐가 목표이다. 그래야 붓도 제자리를 간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예술의 완성된 경지라고 생각한다.’ 


대구=글·사진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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