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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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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누구에게 얻었는지, 오래된 사기그릇을 나도 하나 가지고 있다. 백 년은커녕 오십 년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는 이미 자잘한 빗금들이 여럿 뻗어 있고 테두리에는 한두 군데 이가 빠져 있다. 세월이 만든 ‘허물’로, 상처로 그릇은 여느 그릇과는 다른 단 하나의 그릇이 되어 있다.

 

책장 위에 고요히 앉아 먼지를 포개어 담는 그릇을 들여다볼 때면 그릇과 내가 조금쯤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은 고단하게 흐르고, 그릇에 빗금이 생기는 동안 내 얼굴에도 주름이 생겼구나. 그릇 속에 먼지가 쌓이는 동안 내 속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쌓였구나. 생각지 못한 사이 불쑥 찾아든 어떤 기쁨들, 그보다 많은 슬픔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빗금 사이에 낀 새카만 때가 나의 역사라는 뜻일까. 멀쩡하지 않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그러나 껴안을 수밖에 없는 내 것. 내 그릇.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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