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것과 글 쓰는 것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현대미술가 이피(44)가 첫 에세이집 ‘이피세世’(난다)를 펴냈다. 시카고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고려 시대 불화 기법을 원용해 회화·조각·설치·퍼포먼스 작업을 펼쳐왔다. 올해 초 미국 현대예술재단(The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s·FCA)이 매년 1명 선정하는 도로시아 태닝 상을 한국 작가 최초로 수상한 바 있다.

이피는 13일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3갤러리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제 작업에서 글쓰기와 그림은 하나의 경험”이라며 “혜성이 지나간 자리에 꼬리가 남듯, 미술 작업을 하고 남은 것을 모아서 쓴 것이 글”이라고 설명했다.
표제 ‘이피세世’는 2019년 개인전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에서 따왔다. 이는 작가 내부에 지층처럼 쌓인 형상들을 발굴해 자연사 박물관처럼 전시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책을 기획한 난다 대표 김민정 시인은 “9년 전 이피가 전시를 위해 쓴 짧은 ‘작가의 말’을 보고 그가 글쟁이임을 알아봤다”며 “그가 지은 작품 제목과 캡션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겼고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2016년작 ‘천사의 내부’다. 먹, 색연필, 금분, 아크릴 등으로 작업한 이 작품은 여성의 몸 껍질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심한 인종차별을 겪으며 내 노란 피부, 나를 감싸 안은 껍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며 “차별이 내 작업의 시작인 셈”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이피의 내면을 기록한 에세이와 그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도판 113점이 실렸다. 일부 에세이는 이상 선집 공동번역가 정새벽이 영어로 번역해 함께 수록했다.
시인 김혜순과 극작가 이강백의 딸인 이피는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영문판 표지 등을 작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적 시인인 어머니와의 협업 방식을 묻자 그는 “협업한 적 없다”며 웃었다.
“협업이 아니라 강제입니다. 엄마가 ‘책이 나오니 드로잉을 달라’고 하시는 거죠. 실은 엄마 시를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예술가로서 어떻게 엄마를 넘어설 생각이냐고 묻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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