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눈높이 안 맞아 국론 분열 커
선진국, 사면권 행사 극도로 제한
대상자 엄격 선별 등 법제화 시급
윤석열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관 출신으로 아끼는 후배인 김태우 전 서울 강서구청장을 2023년 광복절 특별사면에 포함했다. 형이 확정된 지 채 3개월도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두 달 뒤 실시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후보로 공천했다. 그가 아무리 공익 제보로 유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잘못으로 생긴 보궐선거에 다시 나갈 수 있도록 사면을 해준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결국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 참패했고, 윤 정부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이재명정부의 광복절 특별사면을 놓고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다. 사면·복권 명단에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부부, 윤미향·최강욱 전 의원 등 국민의 공분을 샀던 여권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서다. 이들에게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사면의 명분과 원칙을 찾기 어렵다. 법치주의 근간을 해치는 ‘사면권 남용’ ‘그들만의 사면 잔치’라는 우려가 크다.

조 전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혐의로 지난해 12월 징역 2년형이 확정돼 수감됐다. 아직 형기의 절반도 채우지 않았다. 범여권의 강성 지지층은 조 전 대표가 ‘검찰권 남용’ ‘정치 보복’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공정과 정의를 저버린 그를 억울한 피해자로 보는 건 보편적 공감을 얻지 못한다. 윤 전 의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 등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위안부 할머니들의 등을 친 건 어이가 없는 범죄다. 광복절 사면 취지를 너무 벗어난 것 아닌가. 두 명의 사면이 몰고 올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느 정권이나 대통령이 봐주려는 정치인을 사면하기 위해 야당 인사를 구색 맞추기로 섞는 방식을 써왔다.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문자로 자당 출신 비리 정치인들의 사면과 복권을 부탁한 건 정치적 흥정이 오가는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조국을 눈감아줄 테니 야당 정치인 비리도 사면해 달라는 것 아닌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정치권의 행태에 신물이 난다.
부적절한 사면의 부작용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병역을 기피하려고 한국 국적을 포기해 23년 동안 입국이 금지된 가수 유승준의 팬들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입국 제한을 재검토해 달라”고 했다. “조국·윤미향 등 정치인 사면 검토에서 드러난 국민통합과 화합의 의지가, 일반 국민인 유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유사한 주문이 사방에서 쏟아질 게 뻔하다. 사면이 어디까지 희화화할지 걱정이다.
우리나라도 사면권 제한 시도는 있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면제도의 오·남용 방지책 강구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한나라당은 2004년 특별사면도 국회의 견제를 받도록 하는 입법을 추진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사면권 제한 공약을 한 바 있다. 하지만 모두 말뿐이었고, 당선된 뒤 이를 지킨 대통령은 없다. 국회도 수차례 사면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다.
사면권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사법부 확정판결을 뒤집는 예외적 수단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사면권을 매우 제한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독일은 70년 동안 대사면 조치가 네 차례에 그쳤다. 사면에 앞서 해당 죄를 판결한 판사 의견을 듣도록 규정했다. 프랑스는 부정부패 공직자와 선거법 위반 사범, 테러와 정치적 차별 범죄자 등에 대한 사면을 금지하고 있다. 핀란드는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할 때 반드시 최고재판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무분별한 사면은 ‘사법 허무주의’를 낳게 마련이다. 이를 막으려면 사면 오·남용을 방지하는 사면법 개정이 필요하다. 사면 대상 배제 조항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등 절차와 내용을 통제해야 한다. 권력형 부정부패 사범, 헌정 질서 파괴범, 반인륜적·반인도주의적 범죄자는 물론이고 대통령 측근에 대한 ‘보은사면’을 막기 위한 규정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법무부의 사면심사위원회가 정권 친화적인 인사들로 구성돼 들러리 노릇에 그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심사를 할 수 있도록 국회가 나서 견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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