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환경부 장관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족과 만나 고개 숙여 사과했다. 대법원이 정부책임을 인정한 후 처음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장관을 넘어 이재명 대통령의 사과 및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 장관은 6일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고 “송구하다. 피해자∙유족의 의견을 대통령과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보고해 조속히 합의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22개 피해자 단체에서 27명이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다만 서울에 내린 호우, 이동이 불편한 피해자 상황 속에 일부 단체 대표들은 참석하지 못한 채 간담회가 진행됐다. 일부 참가자들은 코에 비위관(엘튜브)을 꽂고 산소통에 의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간담회는 지난해 6월 대법원이 국가 책임을 인정한 처음 열린 정부와 피해자 간 간담회였다. 당시 대법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2심 재판부는 “환경부 장관등이 화학물질 유해성 심사를 불충분하게 하고,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해 피해를 키웠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날 정부 측에서는 김 장관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참석했고, 심종섭 국무조정실 사회조정실장, 박연재 환경보건국장 등이 참석했다. 김 장관의 사과로 간담회를 시작했지만, 단체 대표들은 해결되지 않고 묵혀 온 아쉬움들을 쏟아냈다. 김미란씨는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한다. 장관의 형식적인 사과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14년째 관할 부처가 환경부인데, 피해 문제가 심각하다. 교육부, 국방부, 보건복지부 등 다른 부처들이 필요하고, 대통령이 TF를 꾸려 지시해야만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김씨 등 여러 대표자들은 “참사로 인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집계된 피해자가 8011명, 사망자가 1904명”이라며 “대한민국 역사상 피해자와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사건인데 항상 참사에서 이를 제외한다. 특별법, 지원법을 개정할 때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명시해달라”고 요구했다.
피해자들의 요구에 대해 정부가 ‘불통’을 이어왔다는 비판도 있었다. 김경영씨는 “그동안 간담회 등을 진행하면서 한 번도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오늘이 자리가 끝난 뒤 의견 수렴이 어떻게 이뤄지고, 장관의 생각 및 대통령으로 보고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내용을 알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번거롭고 제한적인 보상 체계에 대한 지적도 여러 차례 나왔다. 피해자들은 “(거동도 어려운) 환자가 치료를 받고 영수증을 직접 모아 제출해야 한다”며 “건강보험공단이 우선 지급하고 정부는 이후 정산하는 방식으로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배∙보상 적용 과정에서 시효가 있다는 점도 불합리하다고 지적됐다.
피해 등급이 낮거나 등급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최숙자씨는 “가장 높은 등급인 초고도 피해자는 10명도 안 된다. 알기로 피해자 중 60∼70%는 등급 외로 밀려났다. 사망하고도 인정받지 못한 이도 있다”고 했다. 등급 산정 과정에서 다른 필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투명한 절차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여러차례 나왔다.
어린 시절 피해를 받아 교육, 입대 문제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이야기도 여러 차례 나왔다. 추준영씨는 “아이들이 교육, 병역 과정에서 제대로 도움받지 못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라는 조리돌림까지 당했다. 나라에서 구제해주지 않고 방치했다. 우리 아이는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겠지만, 남은 아이들을 구제해 주셔야 한다”고 밝혔다.
태아 시절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돼 피해를 입은 데 대한 구제 요청도 있었다. 민수연씨는 “아이 다섯을 잃었다. 태아도 잉태되는 순간부터는 가족인데, 태아 노출 사망자는 피해 신청조차 받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청취를 마친 김 장관은 “환경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여러 부처가 함께 해결해야 할 사회적 참사”라며 “시효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다. 단체에서 준 자료를 살펴보고 내용을 파악해 답을 드리겠다. 환경부 소통 창구를 명확히 만들어 알려드릴 수 있게 하겠다”고 답했다. 김 장관은 또 “질환 인정 부분, 등급 판정 및 치료 지원 어려움도 인지했다. 대통령께 보고드리고, 어떻게 하실지 곧 알려드리겠다. 당연히 환경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실, 총리실과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고, 여러 부처가 모여 해결할 수 있는 TF 마련을 알아보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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