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강습소 만들어 수많은 제자 길러내
5, 6년 전 어느 날 필자는 중국 근현대사의 권위자 고 민두기 교수의 수필집을 우연히 펼쳐 읽게 되었다. 글을 쓰다가 지치거나 생각의 흐름이 막힐 때 가끔은 선학들의 이른바 잡문을 읽으며 마음의 매무새를 가다듬고자 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날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에 관한 한글 전수 에피소드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말대로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해방 직전 일제의 민족말살공작이 절정에 이르고 등화관제를 하던 시절에 검은 보를 씌어놓고 그 아래서 외아들에게 ‘가갸거겨’를 가르쳤다. 황국신민교육을 받는 아들로서는 망국의 글을 배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거부하였겠지만 그녀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훗날 그녀의 한글 전수를 민중의 저항으로 인식한 아들은 그런 경험 덕분에 해방 직후 한글학습이라는 ‘새로운’ 사태에 잘 적응했노라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에피소드를 접하는 가운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을 떠올렸다. 일제는 한민족의 거주공간 한반도와 함께 정체성 형성의 주된 요소라 할 국사(國史)를 강탈한 데 이어 국어와 국문마저 말살하려고 하였다. 근래 영화로 상영되어 200여만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 이 사건은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역 대부분이 한힌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임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주시경은 잘 알려진 대로 한글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는 1876년 12월22일(양력)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14년 7월27일(향년 37세) 별세하였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과정에서 당시 훈장이 한문의 뜻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함을 보고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수학, 물리 등 신학문을 배우면서 자음모음 체계와 음성의 과학적 원리 등을 터득하였다. 특히 독립신문 발간과 국문연구소에 관여하면서 한글을 민중과 민중을 하나로 묶는 겨레의 글로 인식하였다. “한 말을 쓰는 사람과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쉽게 익히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띄어쓰기, 철자법 등을 비롯한 문법을 체계화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세종이 닦아 놓은 민족문화의 터전 위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주조로 하는 인류 문명의 대세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역량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한글을 나라의 글로 인식하고 쉽고 편리하게 익힐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시경의 이런 한글 연구는 학문적 성취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07년 국어강습소를 만든 이래 급체로 별세하는 1914년 7월 순간까지 50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수많은 민중을 비롯하여 김두봉,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김윤경, 신명균, 권덕규 등 훗날 국학을 이끌어갈 학자와 교사들이 이러한 보금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병기의 경우, 경기고등보통학교 사범과(한성사범학교의 후신) 재학 중 시말서를 쓰면서까지 휴일마다 학교 옆 주시경 배움터에서 공부하였고 보통학교 훈도 시절에는 강습원을 열어 학교에 가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고 민두기 교수의 어머니도 주시경의 제자들이 펼쳐 놓은 이런 배움터에 동석하지 않았을까.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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