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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여름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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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7-31 22:45:17 수정 : 2025-07-31 2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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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상상해 보기도 전에 이미 성장을 마쳐 버린 듯한 아이들이 있다. 장병기 감독의 장편 ‘여름이 지나가면’에 바로 그런 소년이 등장한다. 영문(최현진)은 동생 영준(최우록)과 형제 단둘이 살고 있다. 농어촌 특별전형 입시를 목표로 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오게 된 초등학생 기준(이재준)은 입학절차를 마치던 날에 학교에서 운동화를 도둑맞는다. 중학생인 영문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새로 전학 온 기준에게는 위협적이기도 한 존재다. 그렇지만 기준은 이내 영문, 영준 형제와 가까워진다. 학원이나 성적으로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싫은 기준에게는 부모 없는 두 형제가 자유로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문과 어울리는 날과 밤이 많아질수록 기준은 이전에는 모르던 것들을 경험해 간다. 도둑질, 폭력, 무단침입과 망보기, 이웃 동네 중학생들과의 영역 다툼. 기준은 새로운 경험을 성장으로 여기며 순간마다 자랑스럽게 여긴다. 기준이 영문의 허락 없이 영준과 함께 자전거를 훔쳐 판 일을 알게 되자 영문의 의문 어린 분노는 조용히 폭발한다. 좋은 집에, 플레이스테이션도 갖고 있고, 부모님도 모두 계신 기준에게는 자전거를 훔쳐야 할 이유가 없다. 영문은 자기와 남동생의 어쩔 수 없는 생활을, 기준이 가벼운 기분으로 신기해하며 따라하는 놀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다. 그 소년은 벌써 어른 남자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면’이 보여주는 영화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날마다 뒤바뀌는 미묘한 기류, 서로의 영향력을 실험하고 힘을 겨루어보듯 툭 내던지는 대사는 각본의 힘에서 시작되어 배우의 연기를 거치고 미성년 배우의 연기를 조율하는 연출력으로 이어진다. 섬세한 감정선의 연출력이 돋보인 장면이 있다. 반장 석호(정준)와 기준이 드러나지 않게 행하는 우정 경쟁은 날마다 바뀌는 영문의 기분과 칭찬의 대상에 따라 뒤집힌다. 어느 날의 석호는 기세등등했다가 다른 날에는 위축된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말하곤 한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미성년 배우는 운동장에서, 학교에서, PC방과 뒷골목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인상을 전한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정말 그런 표정과 저런 말투의 남자아이들이 동네 어딘가에서 뜀뛰고 있을 것만 같다.

 

다시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사 가는 날, 영화는 형제와 기준에게 작별인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한 형제는 여름 뙤약볕 아래에 남겨진다. 너무 멀지 않은 뒤에 기준에게는 이 여름을 회상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영문이 그해 여름을 되돌아보는 일은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이 소년에게 세상이란 온전히 누리며 기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서서히 마비되듯 잊어가기를 요구하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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