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사태로 국민정서 민감…李정부 “국익 최우선 원칙”
“이번 협상이 불공정하게 타결된다면 대대적인 미국산 소고기 불매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미 관세협상 테이블에 미국산 소고기 개방 카드가 오르자 국내 축산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2008년 광우병 파동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한우농가들은 대정부 투쟁까지 예고했다. 정치권 반발도 이어지며 이재명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8만 한우농가가 속한 전국한우협회는 30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한다”며 “굴종적인 한미 관세 협상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한국은 이미 미국산 쇠고기의 세계 최대 수입국이며 2026년부터는 관세도 0%로 전환될 예정”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추가 수입 개방을 강요하는 것은 동맹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불평등 조약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미국산 소고기의 경우 17년 전 광우병 파동 이후 30개월령 미만 소고기만 수입하고 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미국 측 요구에 따라 미국산 소고기 수입 조건을 대폭 완화하는 협상을 진행했는데, 광우병 발생 이력이 있는 미국산 소고기 중 30개월 이상 연령 소에서 주로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 불안이 급속히 확산됐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인간광우병에 걸린다”는 괴담까지 퍼졌다. 대규모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취임 2개월 만에 지지율이 20%대로 폭락하는 등 극렬한 반대에 이명박 정부는 결국 한미 간 협상을 통해 30개월령 미만의 소고기만 수입하도록 제한했다. 당시 야당이던 통합민주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의 요구로 마련한 법 조항이다.
한우농가는 이 같은 월령 제한이 풀리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국민 불신이 다시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 미국산 소고기의 안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국내 소고기 소비가 줄면서 한우 가격까지 동반 하락세를 보인 바 있다. 국내 한우 시장 위축 우려도 있다. 전미육류수출협회에 따르면 소고기 월령 제한 해제 시 약 1억7500만 달러의 추가 수출 수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미국산 소고기가 대량 유입되면 지역 경제 전체가 침체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민경천 전국한우협회 중앙회장은 “이번 협상에서 정해지는 관세만큼 미국산 소고기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며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 기준인 30개월령 제한은 국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역 기준이다. 이를 완화하는 것은 검역 주권 포기이자, 국내 한우 산업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한우협회는 향후 정부의 협상 결과에 따라 1만명 규모의 전국 한우농가 총궐기대회 등 대응 수위를 높여갈 계획이다.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에 부과한 상호관세 25%의 유예 종료 시한은 8월1일이다. 협상 진행 과정에서 민감 품목인 농축산물 시장 개방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며 반발이 커졌다. 정부는 당초 쌀·소고기 대신 옥수수 등 연료용 농산물 수입 확대를 검토했으나,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농축산물 개방 여부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5일 한미 2+2 재무·통상 협의가 돌연 취소된 후 통상현안 긴급회의를 열고 “협상 품목 안에 농산물도 포함됐다”고 처음 공식화한 바 있다.
대통령실 발표 이후 축산업계는 물론 여야 정치권에서도 반발을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전국농어민위원회도 이날 주한미국대사관을 찾아 미국의 농축산물 시장 개방 압박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윤준병 의원은 “미국은 상식과 도덕을 결여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런 행태는 깡패와 다름없다”고도 했다.

한우와 수입 소고기 시장 자체가 분리돼 있는 만큼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시장을 개방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들이 있어 현실성이 낮다는 평도 나온다. 이날 서울 성동구 마장축산물시장에서 만난 50대 상인 김모씨는 “시장이 더 개방되면 한우 판매량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긴 하겠지만 미미할 것이라 본다. 현재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거의 사라졌다”며 “한우는 사치재에 더 가깝기 때문에 비싸도 팔린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육과는 소비자층이 다르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소고기 경우 이미 시장 개방이 돼있는데 검역상 금지 조건이 있는 것”이라며 “검역상 금지조건 완화는 양국간 협의를 거쳐 국회 비준을 받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민심과 미국 모두를 설득해야 할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미 관세 협상 대표단에 “어려운 협의인 건 알지만 우리 국민 5200만명의 대표로 가 있는 만큼 당당한 자세로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실은 국익 최우선 원칙에 따라 우리가 감내 가능한 범위 안에서 한미 간 상호 호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패키지를 마련해 미국과 협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