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은 두루마리 화장지 30롤이었다. 때아닌 개미지옥의 시작이 그랬다는 소리다.
거실에 앉아 있다가 개미 한 마리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뽈뽈뽈 기어가고 있는 개미를 무심코 눌러 죽였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택배 상자에 개미나 벌레가 딸려오는 경우가 간혹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뽈뽈뽈 기어가는 개미 세 마리와 마주쳤을 땐 마음이 심란해졌다. 난데없는 곳에 떨어져 어리둥절해하는 한 마리면 모를까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눈에 띈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잘못됐나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관리실에서 세대 소독 안내가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받아왔고 개미 문제가 입주자 커뮤니티에 올라온 적도 없었다. 우연이겠지, 하면서 나는 애써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것저것 할 일을 하다 다시 거실로 나온 나는 둥근 점 같은 걸 발견했다.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개미 여남은 마리가 둥글게 모여 제자리를 돌고 있었다. 나는 기겁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 둥근 점을 향해 개미들이 뽈뽈뽈, 어디선가 계속해서 기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롤 테이프를 양손에 들고 개미들을 쫓았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개미 행렬이 생각보다 길었다. 종착지는 두루마리 화장지 30롤 비닐팩. 외출했다 들고 들어와 거실 한편에 내려둔 것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 귀퉁이가 뜯겨 있었다. 거기서 개미들이 톡톡 떨어졌고, 그러니까 이 팩 안에는 개미가 잔뜩. 나는 그것을 들고 냅다 뛰어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 공동현관 옆, 작은 화단이 있는 곳에 팩을 내려둔 뒤 나는 다시 집으로 뛰어올랐다. 현관부터 신발장, 화장지가 놓여 있던 거실 구석부터 소파 밑까지 한바탕 청소를 끝낸 뒤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행히 개미들은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고 일렬로만 움직인 모양이었다.
두루마리 화장지는 핸드폰 대리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상담자는 언니였는데 직원은 인심 좋게 언니와 나 모두에게 사은품을 내밀었다. 생필품 가격이 상당히 비싸진 데다 마침 화장지를 사야 했던 때라 기분 좋게 받아 들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대리점 앞 노상에 쌓아두었던 화장지들이라 어느 하나쯤 개미들이 뚫고 들어갈 수도 있었을 법했다. 화장지를 어떻게 버려야 하나. 일단 커다란 종량제봉투를 사 온 다음에. 나는 그런 것들을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뭐가 어찌 됐든 개미들을 잔뜩 죽인 뒤라 기분이 점차 가라앉았다. 직원의 호의가 의도치 않게 악몽이 되고, 꽤 좋은 집 자리를 찾았다고 신이 났을 개미들에겐 때아닌 지옥이 펼쳐진 셈이었다.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네. 한숨을 쉬며 화장지를 내다 놓은 자리로 걸어갔을 때였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황망해진 나는 근처를 급히 돌았다. 공동현관과 로비, 화단과 재활용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화장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잽싸게 들고 가버렸다는 얘긴데. 머리가 아파왔다. 잠깐의 욕심으로 누군가의 집에 다시금 개미지옥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었다. 정말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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