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로 가다 보면 나온다고 했다.
무엇이 나올 것인가 살아 있는 무엇
죽어 있는 무엇이 나와 한적한 교외의 길을 가로막고 눈앞에 불쑥 나타나게 될까.
이 길로 계속 가기만 하면 발견하게 될
어디에나 있지만 이 세상엔 없는
흔한 풍경이 거기
논밭 너머 우뚝 선 가건물에 “자주 근면 협동”이라고 쓰여 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비닐하우스가 줄지어 있고
드문드문 서 있는 농가 마당에는 초록색 새마을 조끼를 입은 헐렁한 유령이 빨랫줄에 널려
한 사람이 긴 장화를 신고 창고 뒤로 막 사라지는 걸 보았는데
그가 모서리를 돌자마자 그 뒤쪽의 시간이 닫혀 버렸다.
(하략)

많이 본 장면이라고, 익숙한 풍경이라고 생각할 때. 길 위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여길 언제 왔더라? 언제 봤더라? 그럴 때. 잠시 여유를 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구석이 기이해진다. “어디에나 있지만 이 세상엔 없는” 무엇을 볼 수도 있다. 농가 마당 빨랫줄에 걸린 “초록색 새마을 조끼를 입은 헐렁한 유령” 같은 것. 어쩌면 일찍이 묘한 예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혹은 조금쯤 아는 무언가 불쑥 출몰할 것 같은 느낌. 나는 불쑥 슬퍼질 수도, 눈물을 쏟을 수도 있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 경험과 기억이 어떤 식으로 작동한 결과가 아닐까.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요체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 기억이 나를 만들었구나. 내가 기억을 만든다고만 여겼는데….
완전히 닫혀 버리는 시간이란 없다. 시를 읽는 지금 이 순간 또한 내 다른 기억들 사이에 슬며시 끼워질 것이다. 끈질기게 남아 나를 다스릴 것이다.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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