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벌어지는 뜻밖의 일들
살아가는 일 자체가 곤경일까
미래에 대해 새로운 생각 하길
리처드 포드 ‘서양인들’(‘여자에게 약한 남자’에 수록, 한기찬 옮김, 프레스21)
지난달에 무슨 일을 하러 캐나다에 가게 되었다. 캘거리에서 밴프로 이동하다 로키산맥을 처음 보는데 문득 작가 리처드 포드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그가 쓴 장편소설 ‘캐나다’가. 한 소년의 유년기를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과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소설로 기억한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나는 캐나다에 와서 미국 작가의 ‘캐나다’라는 장편 생각을 하고 있구나, 라고 중얼거려 보았다. 이 지면에 언젠가 리처드 포드의 소설을 소개하고 싶은 시기를 계속 기다려와서인지도 모르겠다. 원제가 ‘Women with men’인데 ‘여자에게 약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중편 소설집만 출간된 적 있을 뿐, 내가 알기로 그의 단편집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서양인들’은 ‘여자에게 약한 남자’에 수록된 마지막이자 세 번째 중편소설이다. 찰리는 사귄 지 이 년째 되는 헬렌과 파리로 여행을 왔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 찰리는 이런 사람이었다. “한때는 교수였으나 일찌감치 은퇴한 사람, 너무 괴팍한 나머지 아내가 저버린 남자, 아이가 하나 있는 사람, 평가받지 못한 걸작 소품들을 계속 쓰는 것으로 만족하는 작가”, 그리고 지금껏 많은 실수를 저질러와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은 남자. 사십 대를 앞둔 그는 이 여행에 기대가 컸다. 헬렌과의 여행도 파리도 처음인 데다 프랑스 출판사 편집자가 관광객들이 보기 힘든 특별한 장소들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편집자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찰스의 프랑스어 역자를 만나보라며 연락처를 알려주곤 가족과 여행을 떠나버렸다. 파리에 머무를 큰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고 찰스가 실망하자 헬렌이 타이르듯 말했다. 이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그냥 뜻밖의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는 게 어떻겠냐고. 헬렌은 자신처럼 “인생이라는 모진 돌풍과 마주친 여행자”라는 느낌을 주며 때론 회피하고 싶은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몰랐지만 어떤 고통으로 내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여인. 프랑스어에 익숙한 헬렌이 파리에서는 인솔자가 되었다. 어쩐지 그는 또 다른 ‘곤경’에 처한 기분에 휩싸였다.
‘곤경’은 찰리의 소설 제목이었다. “구제불능인 것처럼 보이는 결혼생활”을 되도록 솔직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했던 작품. 그 안에서 이해심과 애정을 공유하려고 애쓰는 부부의 이야기 말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에서 “아직 남아 있는 것 중에서 좋은 면을 보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결혼생활이라고, 심지어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겼고 그의 눈에는 그 방법을 추구하는 과정 역시 곤경으로 보였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곤경일 걸까. 에펠탑을 관광하다 우연히 만난 헬렌의 친구들과 이어진 저녁 자리에서도 찰리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낯선 여행지, 연인들, 어긋나는 대화, 헬렌이 파리에 품고 온 생의 마지막 계획. 결말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는 듯 보인다. “사물의 핵심에서 좀 비켜나 있고” 싶었던 찰리가 이 파리 여행에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혼자가 된 그는 ‘곤경’을 번역 중인 역자를 만나 프랑스어에는 곤경이란 말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찰리는 시내를 산책하다 자신이 이곳에서는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낯선 장소에서 뭔가를 배운. 그래서 이곳에 올 때와는 다르게 자신이 미래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하게 되었다는 것을.
로키 앞에서 자연의 위대함과 겸허함을 배우고 캐나다를 떠나면서 나는 집에 가면 얼른 리처드 포드의 소설을 다시 읽어야지 했다. ‘독립기념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처음 출간한 책이 바로 이 ‘서양인들’이 수록된 ‘여자에게 약한 남자’였다. 그가 주로 다루는 가족의 해체와 의미, 혹은 어른의 진정한 어른 되기 같은 주제를 한층 유려하고도 사색적인 문장으로 풀어낸.
휴가를 떠난 사람들, 지난 방문지를 떠올리는 것으로 휴가를 대신하는 사람 모두에게 이 뜨거운 날들이 미래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면 좋겠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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