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린다. 긴 장마다. 소녀는 비가 싫다. 폭우가 쏟아지는 이 여름에 부모는 별거를 결정했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뤄진 부모의 결정에 소녀는 불안하고 화가 난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소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소녀가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뿐이다. 소녀는 최대한 빨리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소녀는 달린다. 엄마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생활 계약서를 강요할 때, 대책 없이 떠나버린 아빠의 무기력과 이기적인 모습이 싫을 때, 소녀는 자신의 상처 입은 자아를 부여안고 달리고 또 달린다. 부모는 미친 듯이 소녀를 따라가지만 현실을 거부하는 소녀의 미친 듯한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다.
소녀는 불꽃 축제가 열리는 ‘비와’ 호수에 다시 가고 싶다. 한때 세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비와 호수는 불의 축제가 펼쳐지는 곳이다. 불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곳에서는 삶과 죽음의 투쟁이 일어난다. 넘치는 물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불뿐이다. 이곳에서 소녀는 세 가족이 즐거웠던 과거의 추억을 바라본다. 그러나 현실처럼 보이던 행복의 시간은 이내 몽환적인 초현실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신화적 공간이 열린다. 이것은 원초적 체험이다. 물과 불이 격렬하게 투쟁하는 비현실의 공간, 판타지의 공간이 열린다. 이제 소녀는 과거의 나를 묻고 어른이 될 것이다. 엄마 아빠의 육체가 물속에 잠길 때 소녀는 미친 듯이 “나 혼자 두지 마. 어디 가? 어디 갔어?”를 외치지만 부모의 몸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부모의 육체가 완전히 물속에 잠겼을 때 이 장면을 바라보던 소녀의 첫 일성은 놀랍게도 “축하합니다”이다. 소녀는 울고 있는 과거의 자신을 꼭 안아준다. 폭우가 몰아치는 이 여름은 무섭고 나쁜 꿈이었지만 소녀는 이제 뚜벅뚜벅 자신의 삶을 걸어갈 것이다.

1980∼1990년대 일본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1993년 작품 ‘이사(Moving)’가 30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되어 개봉한다. 일본영화산업의 침체가 본격화되고 대형 스튜디오가 몰락하던 시기, 닛카쓰 스튜디오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로망 포르노라는 B급 장르영화를 양산하던 시기에 소마이 신지는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스튜디오 시스템과 일본 독립영화를 연결하며 독립영화의 물결을 선도했다.
오늘날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마구치 류스케 등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자신이 넘어서야 할 산이라고 찬사를 바친 소마이 신지는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와 롱숏, 수평 트레킹 스타일에 담아낸 청소년 성장 서사를 통해 일본의 시대성을 탁월하게 묘파했다. 영화에서 소녀 렌코 역할을 맡은 다바타 도모코의 신들린 연기는 다시 봐도 놀라울 만큼 생생하고 폭발적이다.
맹수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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