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립자문委, 타당성 논의…명성황후 기념관 인근에 부지 마련
사업비 81억, 연면적 2000㎡ 규모…2027년 10월 착공 목표
이충우 시장 “문화재 담당으로 공직 시작…독립운동 鬼 계승”
1926년 12월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합니다.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면서 동시에 ‘편지정책’으로 미주교포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가 백범 선생 앞으로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 액수였습니다. 이때 믿을 수 있는 건 최측근 뿐이었죠.
당시 백범 곁을 지키던 독립지사 중 한 명이 엄항섭 선생(1898~1962)입니다.
엄 선생은 보성학교에 다닐 무렵 3·1 운동을 경험했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비밀결사 ‘동제사’에 가입합니다. 이때 임시정부에 참여한 엄 선생은 김구를 만났고 임시정부의 중심에 섰습니다.

◆ 김구 “엄항섭은 나 같은 독립운동가 구제”…구한말 명문가 출신
1922년 지강대학을 졸업한 뒤 상해 임시정부에 돌아온 그는 백범의 최측근 비서로 활약합니다. 와해된 임시정부를 지키며 자신의 월급으로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했고,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체포하려던 정보를 얻어 위기를 모면하게 합니다.
치외법권 지역인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서 일하던 엄 선생이 일본 경찰의 정보를 입수하는 비밀결사 활동을 벌인 겁니다. 이후 임시정부 법무부 참사, 의정원 의원 등을 맡으며 여주 담당 조사원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엄항섭군은 유지 청년으로 중학 졸업 후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독립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했다…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던 것을 미리 알려 피하게 했다.”

엄 선생은 1898년 9월 지금의 경기 여주시 산북면 주록리에서 아버지 엄주완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승지를 지냈고 할아버지 엄세영은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른바 ‘금수저’ 집안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올 만큼 당시로선 ‘힘 좀 쓰는’ 가문이었죠. 외할아버지 김규식 역시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명문가입니다.
엄 선생의 아버지가 여주로 내려온 건 대한제국의 국운과 관련이 깊습니다. 1907년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진 게 없습니다. 2년제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면서 행보가 드러납니다. 이어 보성법률상업학교에 들어갑니다. 그가 몸담았던 보성전문학교는 이후 김성수 선생이 인수해 1946년 고려대학교로 학명을 바꿉니다.

◆ 명성황후 생가터 인근 조성…의병장 이인영·승려 김용식도 포함
엄 선생은 ‘임시정부의 파수꾼’으로 불렸습니다. 1933년 김구 선생이 장제스를 만났을 때도 함께했고 지원을 끌어냈죠.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거쳐 독립한 조국에서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백범 사망 이후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합니다.
7일 경기 여주시에 따르면 시는 엄항섭·조성환·이인영 선생 등 지역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하는 ‘여주독립운동기념관’ 건립에 착수했습니다. 내년까지 경기도 사전평가와 지방재정투자심사를 거쳐 2027년 10월 착공, 2029년 3월 개관이 목표입니다.

여주시 능현동 257번지 일원 명성황후 기념관 인접 터에 면적 3000㎡, 건축 연면적 2000㎡ 규모로 추진됩니다. 총사업비는 81억9600만원입니다. 도비로 40%가량을 충당할 예정입니다.
기념관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추모실과 함께 체험·교육실, 수장고, 자료실 등으로 구성됩니다.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인근에 세워진다는 점을 활용해 을미사변 이후 의병 활동부터 3·1운동,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사를 특화할 방침입니다. 항일유물은 벌써 150점 가까이 모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엄 선생 외에 조성환 선생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이었습니다. 대신면 보통리에서 자라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이인영 선생은 의병장이자 창의대진소 총대장이었습니다. 김용식 선생은 신륵사 승려로 3·1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지금까지 여주시박물관이 파악한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만 44명에 이릅니다.
앞서 시는 지난해 2월 건립 기본방향을 수립한 뒤 같은 해 8월 타당성 연구용역에 들어갔습니다. 올해 1월 건립 타당성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마쳤고, 이후 건립 추진 부서를 복지행정과에서 문화예술과로 변경했습니다. 4월에는 건립 전담 학예연구사를 채용하는 등 사업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 열정 만큼 ‘치밀한’ 계획 필요…“체계적 전승·보존 요구”
이달 3일에는 여주독립운동기념관 건립자문위원회를 신륵사 인근 여주박물관에서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충우 여주시장은 지역 독립운동과 관련 있는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합니다.
위촉식과 함께 참석자들은 여주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의 추진상황을 공유하고 건립 방향성과 운영계획, 승인절차 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 시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여주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꼭 건립돼야 한다”며 “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협조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 시장이 문화재와 향토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1980년대 초반 여주에서 문화재 담당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인연 덕분입니다. 신혼집도 능현동 명성황후 생가터였습니다.
“시에서 매입해 수리했는데 관리할 사람이 없어 집사람과 등 떠밀려 들어갔습니다. 보일러도 없는 집에서 펌프로 물을 길어 살면서 지역 문화와 역사에 눈을 떴죠.”
사실 여주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은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부지 설정의 근거와 통계, 전시기획 등에 관한 평가위원들의 뼈아픈 지적이 이어집니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치밀한 계획이 더 필요합니다. 세밀한 계획이 뒷받침돼야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승하는 든든한 문화시설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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